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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헨리 데이비스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4381
한자 德倍時
영어음역 J. Henry Davies
이칭/별칭 덕배시(德倍時)
분야 종교/기독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이상규 1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선교사
성별
출생 시기/일시 1856년 8월 22일연표보기 - 출생
출가|서품 시기/일시 1889년 8월 5일 - 목사 안수 받음
수학 시기/일시 1874년~1881년 - 멜버른대학교에서 수학
활동 시기/일시 1889년 10월 2일 - 한국에 도착
활동 시기/일시 1889년 10월~1890년 3월 - 서울에 체류하며 순회 전도 진행
활동 시기/일시 1890년 3월 14일 - 선교를 위하여 부산으로 떠남
몰년 시기/일시 1890년 4월 5일연표보기 - 사망
출생지 뉴질랜드 왕가라이
학교|수학지 멜버른대학교 - 호주 멜버른
활동지 서울특별시
활동지 부산광역시

[정의]

개항기 부산 지역에서 사망한 첫 호주 장로교 선교사.

[개설]

한국 이름은 덕배시(德倍時)이다. 부모는 영국 쉬레스버그(Shrewsburg) 출신으로 흔히 형제교회라고 불리는 플리머스형제단(Plymouth Brethren)에 속한 경건한 신앙인이었다. 12남매 중 네 사람, 즉 조셉 헨리 데이비스(J. Henry Davies)와 누나 메리가 한국 선교사로, 동생 타보르(Tabor)와 사라(Sarah)가 인도 선교사로 자원하였으며, 남동생 존(John)이 장로교회 목사가 된 것으로 보아 기독교적 확신이 깊었던 가정이었다.

[활동 사항]

조셉 헨리 데이비스[1856~1890]는 1856년 8월 22일 뉴질랜드의 왕가라이(Wangarai)에서 9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4살 때인 1860년 부모를 따라 호주 멜버른(Melbourne)으로 이주하였다. 11살 때부터 아버지의 법률 사무소에서 일하였고, 후일에는 멜버른대학교 문과에서 수학하였다. 20세 때인 1876년에 호주 시엠에스(CMS)[Church Missionary Society] 소속 인도 선교사로 자원하여 21개월간 일하였고, 1878년 5월 21일 멜버른으로 돌아왔다.

이후 멜버른대학에 복학하여 헬라 어와 라틴 어, 지학, 화학, 식물학, 비교 해부학 그리고 귀납 논리 등을 공부하고, 1881년 3월 멜버른대학을 졸업하였다. 졸업식에서 고전어 부분 최우수상[An Exhibitioner and Honour Man in Classics]과 자연과학 부분 특별상[a Scholar in Natural Science]을 수상하였다. 그의 학문적 능력을 인정하여 멜버른대학교 트리니티칼리지의 리퍼(Leeper) 박사가 그를 사강사[Tutorship]로 초청하였으나 거절하고, 1881년 4월 코필드문법학교[Caulfield Grammar School]를 설립하여 교장에 취임하였다. 그의 나이 25세 때였다. 이때부터 1888년까지 8년간 교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코필드문법학교는 명문 사립 학교로 발전하였다.

1889년에는 『국내 국외 선교[The Missionary at Home and Abroad]』에 발표된 중국 푸저우[福州]의 알취데콘 존 월푸(Archdeacon John R. Wolfe) 선교사의 편지를 읽고 한국 선교사를 자원하였다. 영국 에딘버러대학교 뉴칼리지(New College)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889년 8월 5일 목사 안수를 받았다. 8월 21일에 멜버른으로 떠나 한국으로 향해 10월 2일에 도착하였다. 5개월간 서울에 체재하면서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와 함께 지내며 한국어를 공부하는 동시에 순회 전도를 진행하였다.

서울에는 이미 선교사가 내한하여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부산으로 가 일하기로 결심하고, 1890년 3월 14일에 누나 메리만 서울에 남겨둔 채 어학 선생과 하인, 그리고 매서할 문서와 약간의 약품 등을 준비하여 서울을 떠났다. 수원·공주·남원 등을 거쳐 하동까지 갔고, 다시 부산으로 향하였다. 약 20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1890년 4월 4일 부산에 도착했으나 과로와 폐렴, 천연두에 감염되어 4월 5일 사망하고 말았다. 시신은 캐나다 선교사 제임스 스카트 게일(James Scarth Gale)에 의해 복병산(伏兵山)에 안장되었다.

조셉 헨리 데이비스의 갑작스런 죽음은 세 가지 결과를 가져왔다. 첫째는 호주 교회가 한국 선교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고, 둘째는 친목과 교제를 위해 시작된 청년연합회가 선교사를 파송하는 조직체[Missionary sending organization]로 발전하게 되었다. 셋째는 한국 선교를 위한 또 다른 조직인 장로교 여전도회연합회[PWMU: Presbyterian Women's Missionary Union]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1900년대를 경과하면서 한국은 호주 장로교회의 가장 중요한 선교 지역이 되었고, 이때로부터 1941년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선교부가 철수할 때까지 78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사상과 저술]

조셉 헨리 데이비스는 신학적으로 볼 때 복음주의적인 인물로 세계 선교의 이상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의 신학 교육과 가정 배경, 그가 출석하던 카오필드교회의 성격 등을 고려해 볼 때에 그는 예수의 재림에 대한 종말론적 기대를 가지고 있었고, 복음전도의 시급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렇게 볼 때 데이비스의 사상은 복음주의적 신학을 따랐음을 알 수 있다. 데이비스가 남긴 저술은 없으며, 다만 호주를 떠날 때인 1889년 8월 21일부터 사망 5일 전인 1890년 3월 31일까지 기록한 일기가 남아 있고, 이 기간 동안 기술한 약 10여 통의 편지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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