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3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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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炳準 |
영어음역 | Yun Byeongjun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232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차철욱 |
성격 | 객주|금융업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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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 남 |
대표경력 | 윤병준상점 사장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3월 2일 - 합병회사 윤병준상점 설립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3월 2일 - 부산곡물신탁주식회사 이사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 경남인쇄주식회사 주주 |
활동 시기/일시 | 1913년 - 구포은행[경남은행] 대주주, 취체역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918년 8월 3일 - 동래은행 1대 두취에 취임 |
출생지 | 부산광역시 |
활동지 | 합명회사 윤병준상점 -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구 부산부 본정 3정목 5] |
활동지 | 부산곡물신탁주식회사 -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동[구 부산부 대청정 1정목 33] |
활동지 | 경남인쇄주식회사 -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구 부산부 영주동 260] |
활동지 | 동래은행 -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경상남도 동래군 동래면 복천동 232] |
[정의]
근대 부산 출신의 객주이자 금융업자.
[활동 사항]
윤병준(尹炳準)은 개항기부터 부산에서 곡물과 면포, 주단, 해산물 무역과 위탁 판매를 해 온 객주이다. 자신의 이름을 딴 ‘윤병준상점’을 운영하였는데, 이 회사는 『조선은행 회사 요록』[1921년판]에 따르면 1920년 3월 2일에 설립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매일 신보』[1919년 1월 1일]에는 1919년에 이미 영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개항기 부산의 조선인 상인들은 일본인 상인과의 접촉을 통해 근대적 상품 거래 방식을 경험하였고, 일제 강점기로 접어들면서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자본을 확대하였다. 따라서 1910년대에는 상점의 형태에 머물러 있었으나, 1910년대 후반부터 근대적 의미의 법인 회사 체제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윤병준 역시 1910년대 상점 수준이던 회사를 1920년 합자 회사라는 법인 회사로 등록하면서 이상의 흐름을 충실히 따라갔다. 특히 윤병준상점이 위치한 부산부 본정 3정목은 일본인 자본의 중심지로, 조선인 중에서도 이러한 시대의 경제적 패턴의 변화에 가장 민감한 부류였다.
윤병준은 이상의 개인적인 경제 활동을 배경으로 부산곡물신탁주식회사[1921년 현재] 이사, 경남인쇄주식회사[1921년 현재] 주주[50주]로 참여하였다. 금융업에도 관심이 많아, 구포저축주식회사[1912년 무렵]에 소극적으로 참여[주식 9주]하다가, 구포은행[경남은행]이 출범하자 대주주[450주, 525주]가 되었으며, 1913년부터 1921년까지 취체역을 담당하였다. 또 1918년 설립된 동래은행에는 700주로 최대 주주가 되어 초대 두취로서 은행을 운영하였다. 그리고 대부업체였던 봉래일기계와 초량일기포의 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윤병준은 개항기에 다양한 형태의 계몽 운동에도 동참하였다. 1906년 4월 설립된 대표적인 애국 계몽 단체였던 대한자강회 동래지회에 회원으로 참가하였으며, 1907년 사립 정정의숙 설립을 위해 20원을 기부하였고, 1907년 일본에 유학한 조선인 학생들이 유학비 문제로 ‘단지 혈맹’하자, 이들을 위한 학자금 모금 운동에도 참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