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3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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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榮彦 |
영어음역 | Yi Youngon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김대래 |
[정의]
일제 강점기와 현대 부산 출신의 기업인이자 정치인.
[활동 사항]
이영언(李榮彦)은 1899년 10월 3일 부산광역시 영도구 대교동에서 태어나, 부산제2상업학교[구 부산상업고등학교, 현 개성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일제 강점기 하에서 조선흥업주식회사 부산지점에 10여 년간 근무하다가 부산봉래주조주식회사 전무로 취임하였다. 그 동안 부산제3금융조합에서 평의원부터 감사를 거쳐 조합장에 이르렀으며, 부(府) 협의회 의원을 지냈다.
해방 직후 부산의 한국인 상공업자들은 상공경제위원회[뒤에 경남상공경제위원회로 개칭]라는 한국인 경제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1945년 9월 7일 이영언은 이 위원회에서 부회장에 선임되었다. 해방 후 미군정은 일본인들의 경남상공경제회를 접수하여 한국인을 임명하였는데 이영언은 이때 이사로 임명되었다. 한편 이영언은 일제 강점기에 부산의 석유왕으로 군림했던 입석량웅(立石良雄)이 세운 (주)입석상점이 해방 이후 적산[국가 귀속 재산]이 되자 입석상점의 관리인이 되어, 입석산업으로 회사명을 바꾸었다.
1946년 7월 입석산업이 불하되었을 때 입석산업이 소유하고 있던 석유 판매권이 세 사람에게 나뉘어 불하되었는데, 이영언도 이때 불하받아 한국미유(주)를 설립하였다. 1946년 이영언은 경남석유배급중개업자연합회 이사회장에 취임한 것을 계기로 실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1946년 7월 16일 임의 단체로 설립된 부산상공회의소 제1회 의원 총회에서 이영언은 부회장에 선임되었고, 1949년 7월 10일 제2대, 1952년 9월 17일 제3대 부산상공회의소에서 특별의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1954년 1월 25일 신 상공회의소법에 의한 초대 부산상공회의소에서 이영언은 다시 특별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53년 국민회 영도지구 지부장을 지냈는데, 이를 바탕으로 이영언은 1954년 5월 20일 치러진 3대 민의원 선거와 1958년 5월 2일 치러진 제4대 민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소속으로 국회 의원에 당선되었다. 특히 이 선거 때는 극악한 폭력을 자행하여 다른 정치인이 입후보조차 할 수 없게 만들어 무투표 당선이라는 진기록을 세웠다. 제4대 국회에서 이영언은 상공분과 위원회의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이영언은 1958년 4월 1일 부산직할시 승격기성회에서 벌인 부산직할시 승격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하지만 영도 일대에서 부정 축재와 부정 폭력 선거로 악명을 떨친 탓에 1960년 4·19 혁명의 와중에서 이영언의 가택은 시위대의 습격을 받아 풍비박산이 났으며, 이듬해 5·16 군사 정변 직후 부정 축재 혐의로 쇠락의 길을 걸었다. 사망 연대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