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2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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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關白承襲告慶差倭 |
영어의미역 | Allowance of Japanese Diplomats’ Visit after the Death of Gwanbaek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관직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홍성덕 |
[정의]
조선 후기 일본의 최고 통치자인 관백의 즉위를 알리기 위해 부산 왜관에 온 일본의 임시 외교 사절.
[개설]
차왜(差倭)는 일본의 최고 통치자인 관백(關白)이나 대마 도주의 죽음, 승습(承襲), 통신사행이나 문위행(問慰行)의 파견 요청, 호행·호환 및 두 나라 사이의 주요한 외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이 조선에 파견한 임시 외교 사절의 통칭이다. 관백 승습 고경 차왜(關白承襲告慶差倭)는 일본의 최고 통치자인 관백이 새로 즉위한 것을 알리기 위해 파견된 차왜를 말한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관백 승습 고경 차왜는 조선 후기 조선과 일본 사이에 정식으로 파견이 허용된 외교 사절이 아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대조선 외교 사절이 축소됨에 따라 무역량이 줄어들자 일본 대마 도주는 여러 명목으로 사절을 파견하여 무역량을 증대하고자 하였는데, 관백의 즉위를 축하하는 임시 외교 사절을 파견한 이유도 그중 하나이었다. 특히 관백의 즉위는 통신사행의 주요 목적이었으므로, 관백의 즉위를 알리는 차왜는 조선 정부로부터 외교 사행(使行)으로 접대를 받을 수 있었다.
[담당 직무]
관백의 즉위를 알리는 관백 승습 고경 차왜는 1651년(효종 2) 관백 도쿠가와 이에쓰나[德川家綱]의 즉위를 알리기 위해 부산 왜관에 온 등성심(藤成諶)이 외교 사절로서 처음 접대를 받았다. 이후 제14대 관백인 도쿠가와 이에모치[德川家茂][재위 1858~1866]의 즉위까지 차왜를 파견하였다. 관백 승습 고경 차왜는 예조 참판, 예조 참의, 동래 부사, 부산 첨사에게 보내는 서계(書契)를 지참하였다.
구성은 정관(正官)[외교 사절의 우두머리], 도선주(島船主)[정관이 승선하지 않은 배의 책임자], 봉진 압물(封進押物)[조선 국왕에게 바치는 선물을 담당하는 관리] 각 1명, 시봉(侍奉)[시중을 드는 사람] 2명, 반종(伴從)[수행 인원] 16명, 격왜(格倭)[노 젓는 사람] 70명 등으로 이루어졌다.
왜관에 머무르는 기간은 60일이었고, 그중 익힌 음식으로 접대하는 날은 5일이었다. 부산 왜관에 도착한 이후 중앙에서 파견한 경접위관이 접대를 담당하였으며 하선 다례(茶禮), 하선연, 별연, 예단 다례, 상선연 등의 연향 접대를 받았다. 관백 승습 고경 차왜로 부산 왜관에 도착한 사절은 1651년 등성심, 1680년(숙종 6) 평진현(平眞賢), 1709년·1713년 평윤구(平倫久), 1716년 평방직(平方直), 1761년(영조 37) 평번우(平蕃祐), 1787년(정조 11) 평창상(平暢常) 등이었으며, 1746년(영조 22)에 파견된 차왜의 이름은 확실하지 않다.
[관련 기록]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 『변례 집요(邊例集要)』, 『통문관지(通文館志)』, 『동문휘고(同文彙考)』, 『통신사 등록(通信使謄錄)』 등에 기록이 실려 있다.
[변천]
관백의 즉위를 처음 알린 것은 1624년(인조 2) 고천우마조지차(古川右馬助智次)이었다. 고천우마조지차는 인조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부산 왜관에 왔으며, 당시에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즉위를 보고하였다. 이후 1632년(인조 10) 파견되어 온 귤성공(橘成供)은 자리에서 물러난 관백의 죽음과 새로운 관백의 즉위 및 대마 도주가 에도에서 대마도로 돌아온 것을 알려 왔다. 귤성공의 경우 간단한 다례 접대만을 받았으며, 외교 사절로서 접대를 받기 시작한 때는 1651년 등성심 이후의 일이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 후기 대일(對日) 외교 사행인 통신사행의 파견과 관련하여 초기 파견 교섭에 대한 내용을 알 수 있는 차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