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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4278
한자 東槎上日錄
영어음역 Dongsasang Illok
영어의미역 1617 Travelogue of Japan
이칭/별칭 『오추탄 동사상 일기』,『오추탄 동사상 일록』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전적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한태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고도서
저자 오윤겸
권책 1책
행자 10행 28자
규격 27.8×19.2㎝
어미 상이엽화문어미(上二葉花紋魚尾)
권수제 오추탄동사상일기(吳楸灘東槎上日記)
판심제 오추탄동사상일록(吳楸灘東槎上日錄)
저술 시기/일시 1617년연표보기 - 저술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 -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대로 201

[정의]

1617년 부산을 출발해 일본 통신 사행에 참여한 오윤겸(吳允謙)의 사행록.

[개설]

조선 시대 우리 민족의 공식적인 일본 체험은 외교 사절인 통신사(通信使)를 통해 이루어졌다. 바다를 건너야 하는 목숨을 거는 사행이었던 만큼 사행원들에게 있어 그 체험은 실로 소중할 수밖에 없었고, 견문과 감상을 전달하고자 하는 의지는 일기와 시문, 그리고 견문록으로 대표되는 사행록(使行錄)의 저술로 이어졌다. 오윤겸『동사상 일록(東槎上日錄)』도 그 연장선상에 놓이는 대표적인 사행록이다.

『동사상 일록』은 1617년(광해군 9)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의 정사(正使)로서 일본을 다녀온 오윤겸이 사행에서의 견문과 감상을 일기와 시로 나누어 싣고 있다. 일기에서는 다른 사행록과 달리 오로지 부산에서의 출발과 도착까지만 기록하고 있어 사행 전모를 파악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저자]

오윤겸[1559~1636]의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자는 여익(汝益), 호는 추탄(楸灘)·토당(土塘)이다. 『쇄미록(瑣尾錄)』을 남긴 선공 감역(繕工監役) 오희문(吳希文)과 군수 이정수(李廷秀)의 딸인 연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24세인 1582년(선조 15) 사마시에 합격한 후 1589년 전강(殿講)에서 장원하여 영릉 참봉(英陵參奉)과 봉선전 참봉(奉先殿參奉)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호 체찰사(兩湖體察使) 정철(鄭澈)의 종사관으로 발탁되었으며, 시직(侍直)을 거쳐 평강 현감으로 5년간 봉직하면서 1597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홍문관 부수찬, 이조 좌랑, 지제교, 부교리를 역임하였는데, 1602년 스승 성혼(成渾)을 변호하다가 배척을 받아 경성 판관, 안주 목사, 동래 부사 등의 외직을 역임하였다.

1610년(광해군 2) 비로소 내직으로 들어와 호조 참의, 우부승지, 좌부승지 등을 역임하였으나,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던 정인홍(鄭仁弘)을 탄핵하다 강원도 관찰사로 좌천되었다. 이후 중앙으로 돌아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으나, 정계가 혼란해지자 어버이의 봉양을 구실로 광주 목사(廣州牧使)를 자원하기도 했다.

1617년 다시 첨지중추부사에 복귀한 후 회답 겸 쇄환사의 정사로서 428명의 사행원을 이끌고 일본에 가서 임진왜란 때 잡혀갔던 포로 321명을 쇄환하였다. 통신 사행에서 돌아온 1618년 폐모론에 반대하다 탄핵을 받자 벼슬을 버리고 광주 선영하의 토당(土塘)으로 물러나 화를 피하였다.

1622년 명나라 희종(喜宗)의 즉위를 축하하는 하극사(賀極使)로 다녀온 후 대사헌, 이조 판서, 예조 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거쳐 1628년(인조 6) 70세로 영의정에 이르렀다. 1635년 12월 9일 인조의 비인 인열 왕후(仁烈王后)가 42세의 나이로 출산을 하다 병을 얻어 죽자 국상의 총책임자인 총호사(摠護使)로서 최선을 다하다 과로로 병을 얻어 그 이듬해 1월 19일 죽었다.

『인조실록(仁祖實錄)』에 수록된 「졸기(卒記)」에 의하면 성리학의 대가 성혼의 문하로 학업에 자못 연원이 있었으며, 사람됨이 온순하고 청아하며 단정하고 순수하여 사림에게 추앙을 받았다고 한다. 또 덕업의 수양에 힘써 사장(詞章)에는 뜻을 두지 않았으나 그 문장은 평이하면서도 조리가 있고, 시는 맑으면서도 운율에 어긋남이 없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부인은 종사랑(從仕郞)을 지낸 이응화(李應華)의 딸 경주 이씨와 계실 덕수 이씨이며, 슬하에 세자익위사 위솔(世子翊衛司衛率), 형조 좌랑, 면천 군수를 지낸 장남 오달천(吳達天)과 급구 현령을 역임한 차남 오달주(吳達周)가 있다.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인 오달제(吳達濟)가 사촌이고, 대제학과 병조판서를 지낸 오도일(吳道一)이 그의 손자이다. 저서로는 연보·시문·계사(啓辭)·제문 등을 담은 문집인 『추탄집(楸灘集)』을 비롯하여 통신사 사행록인 『동사 일록(東槎日錄)』과 『해사 조천 일록(海槎朝天日錄)』 등이 전한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오산리 산5번지에 있다. 임종할 때 아들에게 시호를 청하지 말고 비를 세우지 말라고 하였으나, 신도비는 좌의정 김상헌(金尙憲)이 짓고 이조 판서 송준길(宋浚吉)이 썼다. 1663년(현종 4) 1월 29일 충간(忠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광주(廣州)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이집(李集)·임숙영(任叔英) 등과 함께 배향되고, 평강의 산앙재영당(山仰齋影堂)에 제향되었다.

[편찬/간행 경위]

1763년(영조 29) 통신 사행에 정사로 참여한 조엄(趙曮)의 『해사 일기(海槎日記)』 10월 6일자 기록에는 통신사 사행원들이 남긴 일기를 1748년 통신사 정사인 홍계희(洪啓禧)가 수집하여 『해행총재』라고 이름을 붙였고, 부제학 서명응(徐命膺)이 이를 모두 61편으로 재정리하여 제목을 『식파록(息波錄)』이라 바꾼 후 조엄에게 보내 준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조엄은 이 『식파록』에 자신의 『해사 일기』를 첨가해 다시 『해행총재』라 이름을 붙였다.

오윤겸『동사상 일록』조엄이 엮은 것으로 보이는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해행총재』 9권에 『오추탄 동사상 일록(吳楸灘東槎上日錄)』이란 이름으로 수록되어 있고,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국역한 『국역 해행총재』에는 『동사상 일록』이란 이름으로, 신유한(申維翰)『해유록(海游錄)』, 강항(姜沆)의 『간양록(看羊錄)』, 경섬(慶暹)『해사록(海槎錄)』 등과 함께 Ⅱ권에 수록되어 있다. 또한 조선고서간행회(朝鮮古書刊行會)에서 영인한 『조선 군서 대계(朝鮮群書大系)』 속속(續續)편에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동문선(東文選)』 등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형태/서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해행총재』 권9에 수록된 『오추탄 동사상 일록』은 사주 단변(四周單邊) 반곽(半郭) 21.5×15.7㎝, 10행 28자, 주쌍행(注雙行), 상 이엽화문 어미(上二葉花紋魚尾) 27.8×19.2㎝의 필사본 1책으로 되어 있다.

[구성/내용]

『동사상 일록』은 크게 일기와 시로 구성되어 있다. 일기는 1617년 7월 4일 도일(渡日)을 위한 해신제를 지내기 하루 전부터 사명을 마치고 9월 18일 부산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을 담고 있는데, 다른 사행록과 달리 서발(序跋)이 없고, 통신사 명단인 좌목(座目), 국서와 별폭(別幅) 등을 담은 ‘가지고 가는 물건(賚去物件)’ 및 일본의 견문을 항목별로 정리한 문견록(聞見錄) 등이 없다. 또 일본으로 가기 전 서울 출발부터 부산 도착까지의 여정 기록이 빠지고 오로지 부산 출발에서 부산 도착까지의 기록만 담고 있다.

시는 일기와 달리 「차안동루중(次安東樓中)」·「신녕죽각차부사운(新寧竹閣次副使韻)」·「경주도중차부사운(慶州途中次副使韻)」 등에서 보이듯 도일(渡日)을 위해 부산에 도착할 때까지의 노정을 담고 있다. 부산에서 지은 시 가운데 「차동래연당운(次東萊蓮堂韻)」은 7년 전 동래 연당에 와서 자신이 지었던 시가 현판으로 걸린 것을 보고 지은 것으로, ‘제2의 고향’인 동래를 떠나 일본으로 가야 하는 심정을 읊고 있다.

[의의와 평가]

『동사상 일록』은 조선 후기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의 사행록 가운데 정사(正使)가 남긴 현존하는 유일한 사행록으로, 임진왜란으로 잡혀 간 조선 피로인(被虜人)들을 쇄환하기 위한 사신으로서의 고민과 갈등이 잘 반영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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