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265 |
---|---|
한자 | 趙公遺事記 |
영어의미역 | Achievements of Lord Jo |
이칭/별칭 | 『조공 유사』,『조공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동철 |
[정의]
1767년 동래 부사 엄린(嚴璘)이 임진왜란 때 순절한 양산 군수 조영규(趙英珪)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지은 전기.
[저자]
엄린[1716~1786]의 자는 유문(孺文), 호는 오서(梧西)로, 이후 엄숙(嚴璹)으로 개명하였다. 1766년 11월부터 1768년 4월까지 동래 부사를 맡았다.
[편찬/간행 경위]
엄린은 조영규의 고향인 장성에 공문을 보내어 조영규에 관한 자료를 구하였으나, 그의 후손이 미미하여 자료를 확보하지 못하였다. 구한 자료 가운데 송계(松溪) 변씨(邊氏)가 지은 『조공전(趙公傳)』과 참봉 기정익(奇挺翼)이 지은 행장은 조영규의 공적을 기리기에 부족하였다. 조영규 부자의 사적(事蹟)은 조영규만을 위한 것이 아니므로, 그 개략을 인용하고 『충렬사지』의 권중(卷中)에 수록하여 후세에 믿을 만한 근거가 되기 위하여 유사의 형태로 전기를 지었다.
[형태/서지]
『충렬사지(忠烈祠志)』 권4 「조공 유사(趙公遺事)」에 ‘조공 유사기(趙公遺事記)’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엄린의 문집이 전하지 않기 때문에, 문집 수록 여부는 알 수 없다. 권4 「조처사전(趙處士傳)」은 조영규의 아들 조정로(趙廷老)의 전기이다.
[구성/내용]
『조공 유사기(趙公遺事記)』는 조영규의 가계와 경력, 양산 군수 조영규의 동래성 전투 참여, 아들 조정로의 효성, 조영규에 대한 추모, 표창, 조영규의 가족과 직계 후손, 유사를 쓰게 된 내력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영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과 함께 싸우다 순절하였다. 당시 나이는 58세였다. 엄린은 조영규가 양산 군수로 있으면서 전투에 참여한 것을 높이 평가하였다.
현종 때 장성의 인사가 처음으로 조영규·조정로 부자를 모암(慕巖)서원에 향사한 사실, 송준길(宋浚吉)이 상소하여 두 부자의 충효문을 세운 사실, 송시열(宋時烈)이 동래부 순절 비문을 지어 그 사적을 기록한 사실, 숙종 때 부자에게 관직이 추증된 사실, 동래 부사 권이진(權以鎭)이 충렬사 별사(別祠)를 지어 조영규를 향사한 사실, 그리고 충렬사에 합향(合享)한 사실, 양산 주민이 사상을 세운 사실 등 조영규의 공적을 기리는 사업에 대한 내용이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다.
기문의 끝 부분에는 부록 형태로 된 글이 있다. 송상현과 정발(鄭撥)은 공적이 다 드러났지만, 조영규는 그에 미치지 못한 점을 기술하고, 충렬사에 합향할 때도 두 사람과 병향(並享)은 하였지만, 조영규의 관등을 몰라 두 사람보다 낮추어 배향된 것이 애석하다고 하였다.
[의의와 평가]
『충렬사지』 권4에 수록된 「오산 명인록 조양산전(鰲山名人錄 趙梁山傳)」과 비교해 볼 때, 임진왜란 당시 조영규의 공적을 기술한 대표적인 전기이다. 특히 엄린이 동래 부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 『충렬사지』에 수록하기 위하여 직접 지은 것이다. 동래 지역에서 동래 부사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임진왜란에 관한 기억과 전승 사업의 대표적인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