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2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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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苾彩 |
영어음역 | Bak Pilchae |
이칭/별칭 | 추호(秋湖),계서(桂瑞) |
분야 | 문화·교육/교육,성씨·인물/근현대 인물,종교/유교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동래로 103[명륜동 235]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서용태 |
[정의]
근대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유학자이자 교육자.
[가계]
본관은 밀성(密城). 자는 계서(桂瑞), 호는 추호(秋湖). 아버지는 박기택(朴琦澤)으로 1849년(철종 즉위년) 명륜동에 서당을 열었다.
[활동 사항]
박필채(朴苾彩)[1842~1925]는 1842년(헌종 8) 2월 12일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다. 1849년 아버지 박기택이 가족을 데리고 동래로 이사하여 명륜동에 서당을 열어 동래에 정착하였다. 박필채는 어려서 훈장인 아버지에게 글을 배웠고, 자라면서 아버지의 친구인 해산(海山) 강필문(姜必文)과 양산의 입헌(立軒) 한운성(韓運聖)에게 수학하였다. 박필채는 동래에서 훈장으로 명성을 얻어 동래 부사 정현덕(鄭顯德), 수신사 김기수(金綺秀), 시인 강위(姜瑋) 같은 명사들과 교유하였고, 새로 부임한 동래 부사들로부터 자녀 교육을 부탁받기도 하였다.
박필채는 47세 때 유림의 추천으로 동래부의 면 훈장(面訓長)을 맡았고, 58세에는 성균관 박사(博士) 직함을 받았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후 부산이 개항장이 되면서 신문물이 빠르게 확산되자, 박필채는 “조정에서 외국과의 통상을 허락하였고, 외국 문화를 수용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이용할 필요가 있다고”고 강조하였다. 개항으로 외국과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1895년(고종 32) 박기종(朴琪淙)이 영주동에 설립한 개성학교와 기독교 선교사들이 세운 부산진일신여학교 등 신학문을 가르치는 학교들이 속속 설립되었다.
박필채는 신학문을 배척하지 말고, 힘껏 배울 것을 권하면서 신식 학교의 설립과 교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05년 동래에 설립된 외국어 학교인 개양학교(開揚學校)의 부교장(副校長)을 맡았고, 동래기영회 설립에 참여하여 회장을 지냈다. 1906년 동래기영회에서 세운 삼락학교(三樂學校)의 교장이 되었다. 1907년 11월 개양학교가 삼락학교에 흡수되어 동래사립동명학교[현 동래고등학교]로 개편된 후 초대 교장을 지냈다. 1908년에는 동래 향교의 유림이 건립한 사립 명륜학교[현 동인고등학교]의 학감에 선임되었으며, 동래 지역의 여학교인 정정의숙(貞靜義塾)의 설립에도 관여하였다.
예순이 넘도록 한학을 공부한 유학자 박필채가 외국 문물의 수용과 신학문 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신식 학교의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여 자주와 권리를 되찾기 위해서였다. 1910년 조선이 일본에 강제로 병합되자 박필채는 교육 활동을 모두 중단하였다. 그리고는 동래 지역의 원로들과 옛 민적(民籍)을 불태워 영보단(永報壇)에 묻고, 후세 사람들이 잊지 않도록 마안산 기슭에 비석[영보단 비]을 세웠다. 영보단 비는 현재 동래구 복천동 50번지 복천박물관 입구에 있다. 평생을 후진 양성에 힘쓰며 청빈하게 살았던 박필채는 오랫동안 병석에 있다가 1925년 2월 3일 문하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박필채는 문집인 『추호 유고(秋湖遺稿)』 5책을 남겼다. 2002년과 2003년 부산광역시사편찬실에서 『추호 유고』 한글판을 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