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1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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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明月寺蛇王石 |
영어의미역 | Sawangseok Rock at Myeongwolsa Temple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강서구 지사동 산498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이연심 |
[정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지사동 흥국사에 있는 삼국 시대의 석탑 면석(石塔面石).
[개설]
명월사 사왕석이 발견된 흥국사는 명월사 옛 터에 세운 사찰로, 1956년에 다시 중건되었다. 경내에는 가락국 태조왕 영후 유허비(駕洛國太祖王迎侯遺墟碑)가 세워져 있다. 명월사 터를 전하는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헌종 34년(1708)에 승려 증원(證元)이 편찬한 「김해 명월사 사적비(金海明月寺史蹟碑)」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명월사가 명월산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김해 명월사 사적비」에는 명월사 내력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명월사는 임진왜란 때 불타 버렸는데, 1618년(광해군 10)에 중건되었고, 그 뒤 또 다시 중수(重修)할 때 ‘건강 원년 갑신 삼월 남색(健康元年甲申三月藍色)’이라고 새겨진 기와가 무너진 담장 아래서 발견되었다. 건강 원년은 144년(수로왕 103)이며, 이로써 장유 화상(長遊和尙)이 일찍이 서역 불교(西域佛敎)를 이 땅에 전래한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장유 화상에 관한 행적은 『삼국유사(三國遺事)』 등 문헌에 기록되지 않은 채 전설만 전하기 때문에 그 내용을 있는 그대로 신빙하기 어렵다. 다만 장유 화상과 관련된 전설에 후대 관념과 불교적 윤색이 더해졌음은 분명하지 않을까 한다. 흥국사 경내에 있는 명월사 사적비의 비문(碑文)을 보면, 가락국 수로왕(首露王)이 높은 산길 아래서 만전(滿殿)을 베풀어 허황후(許皇后)를 맞이하였으며, 익일(翼日)에 궁으로 돌아갈 때 허황후가 입었던 비단 바지를 벗어서 산신(山神)께 바쳤다고 전해 오고 있다.
명월사가 역사상 자취를 감춘 이유는 관련 기록이 없기 때문에 분명히 밝힐 수는 없지만, 여러 자료 등을 종합하여 명월사의 변화를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가락국 수로왕이 허황후를 부인당[경상남도 창원시 웅동면 용원리]에서 맞이하여 여기까지 와서 여러 신하들을 물리치고 단둘이 산으로 올라가 산골짜기에서 하룻밤을 함께 지냈다. 왕은 나중에 달이 밝게 비춰 주던 이 산을 명월산(明月山)이라 하고 암자에 달빛이 비추었던 그날 밤의 일을 생각하여 명월사(明月寺)라고 명명하였다. 왕은 또 명월사를 크게 증축하게 하고 앞들에 있는 토지를 많이 하사하였다. 그 때문에 절이 크게 흥성하였고, 승려도 300여 명이나 되었으며 그 절에 소속한 암자도 여럿이 있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수도[김해읍]로 가는 길이 그 절 앞으로 났으므로 하루에 수백 명이 그 절을 오가곤 했다. 절에서는 나중에 손님들을 맞는 것이 귀찮아서 행상과 모양이 좀 이상한 사람만 보면 대접을 후히 하고 “어떻게 하면 이 절에 손님이 안 오시겠습니까? 좀 가르쳐 주시오.” 하고 물었다. 어느 날 행색이 표표한 젊은 과객이 이 절에 들자, 승려들은 그를 찾아와 역시 어떻게 하면 손이 안 오겠느냐고 물었다. 젊은 과객은 중의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그렇게 손님이 오는 것이 귀찮거든 이 절에 쑥 내민 산봉우리를 끊어 놓으면 다시는 손님이 안 올 것이오.” 하고 일러 주고 홀연히 가 버렸다.
승려들은 이튿날 곧 일꾼을 시켜서 산봉우리를 끊어 버렸다. 그랬더니 그 뒤부터는 정말 손님이 오지 않고 날마다 승려가 몇 명씩 죽어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위 절에서 죽은 승려는 그 근처에서 화장하고, 아래 절에서 죽은 승려는 아래 절 근처에서 화장을 하였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 화장터를 가리켜 웃영장골, 아래영장골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터에는 불에 그슬린 돌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한다.
[위치]
명월사 사왕석은 부산광역시 강서구 지사동 명동 마을 산498번지에 위치한다.
[형태]
명월사 사왕석은 1956년 흥국사 칠성각을 건립할 때 출토된 것인데, 화강암으로 만든 석탑 면석이다. 크기는 높이 52㎝, 폭 74㎝, 두께 15㎝이다. 마멸이 심하여 선명하지는 않지만 조각 수법은 꽤 우수하다. 석탑 면석에는 중앙에 석불 좌상, 그 양쪽에는 뱀 한 마리씩이 양각되어 있다. 이처럼 불상과 뱀이 함께 조각되어 있는 것은 특이한 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일부에서는 삼매경에 잠긴 불타를 양쪽에서 뱀이 서로 감고 있는 형상의 이 조각을 인도의 야요디아에서 볼 수 있는 ‘무칠리디아’라는 사왕(蛇王)과 같다고 한다. 이 사왕이 열반 속에 잠겨 있는 불타를 보호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에 주목하여 사왕석이 발견된 이곳을 인도 아유타국과 가락국의 문화 교류를 입증하는 자료가 되며 우리나라에 남방 불교계가 전해진 근거로 보기도 한다.
[현황]
명월사 사왕석은 현재 흥국사에 보관되어 있다. 또 함께 발견된 다른 석제품 조각 1점도 흥국사에 보관되어 있다. 1983년 1월 명월사 사왕석이 발견된 곳에서 금동여래입상(金銅如來立像) 1구가 출토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명월사 사왕석을 통해 볼 때 남방 불교 색채를 확인할 수 있으나, 이것이 인도 불교와 가야의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보기에는 문헌 및 고고 자료가 빈약하여 단정하기 어렵다. 다만 명월사 사왕석은 고려 시대 허황후 전승이 기록될 때 당시 불교적 색채가 반영되어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