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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4118
한자 金邦翰
영어음역 Gim Banghan
이칭/별칭 공점(公漸),오정(熬亭)
분야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정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학자|교육자
성별
본관 경주
출생 시기/일시 1635년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74년 - 사마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78년 - 구강서원 창건에 참여
활동 시기/일시 1688년 - 『주역언해』 저술
몰년 시기/일시 1697년연표보기 - 사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0년 - 묘소를 용수리 봉천산으로 옮김
출생지 기장 - 부산광역시 기장군지도보기
거주|이주지 기장 -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지도보기
묘소|단소 김병한 묘 -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용수리 산막 마을 봉천산
사당|배향지 이현사 -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용수리 산막 마을
사당|배향지 기장향교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교리 62지도보기

[정의]

조선 후기 기장의 대표적인 유학자.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공점(公漸), 호는 오정(敖亭). 김방한의 조상은 조선 전기에 경주에서 기장으로 이주하였다. 할아버지는 임진왜란 일등 공신으로, 병조 판서에 추증된 도정(陶亭) 김윤룡(金潤龍)이고, 아버지는 통덕랑 김경유(金慶裕)이다. 어머니는 김해 허씨(金海許氏)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허영호(許齡虎)의 딸이다. 부인은 김시겸(金是兼)의 딸이다.

[활동 사항]

김방한(金邦翰)[1635~1697]은 1676년(숙종 2)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에 은거하며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매진하였다. 또한 기장에 대한 불리한 정책을 시정하기 위해 힘썼다. 이에 대한 내용은 김방한이 지은 『오정 일고(敖亭逸稿)』 속의 「기장현 구폐소(機長縣舊弊疏)」 및 「걸하미면 환속소(乞下味面還屬疏)」에 나타나 있다. 「기장현 구폐소」는 기장현 백성들이 1631년(인조 9)부터 부담하게 된 전선(戰船)에 관련된 폐단을 줄이는 방책을 적은 상소문이다. 「걸하미면 환속소」는 행정 구역 재편으로 기장이 양산, 울산, 동래 등에 귀속되는 과정에서 생긴 문제점을 해결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기장현은 1599년(선조 32) 동래에 병합되었는데, 이때 하미면[현 장안면·정관읍]은 울산에 속하게 되었다. 이에 김방한은 “기장현은 농토가 적어 백성이 가난하고 자립할 수 없으니 하미면을 돌려 달라”고 상소하였다. 이후 1681년(숙종 7) 하미면이 기장현에 속하게 되었으니 김방한의 상소가 일정하게 기여했음을 알 수 있다. 1698년(숙종 24) 임금에게 올린 「응지책(應旨策)」에도 흉년으로 인한 환곡 탕감 대책을 제시하는 등 수시로 기장민의 민원을 대변하였다. 교육에 대한 열성도 커서 1678년(숙종 4) 울산부 동쪽 2㎞[5리] 거리에 정몽주(鄭夢周)와 이언적(李彦迪)을 봉안하는 서원 창건에 관여하였고, ‘구강(鷗江)’이라는 사액을 받을 때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학문과 저술]

『주역언해(周易諺解)』 3권을 저술하여 1688년(숙종 14) 임금에게 바쳐 포장(襃獎)을 받았다. 또한 2권 1책으로 된 『오정 일고』가 전한다. 이 책은 1911년 김방한의 8세손 김시학(金時學) 등이 수집 간행한 것으로, 상권에는 소(疏) 3편, 책(策), 잡저(雜著), 서(序), 기(記), 축문(祝文), 애사(哀辭) 그리고 하권에는 행장(行狀), 묘갈명(墓碣銘), 묘지 등에 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묘소]

김방한의 묘는 삼동산리 서쪽 언덕에 있었는데, 1960년 후손들이 기장군 정관읍 용수리산막 마을 봉천산 기슭으로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기장군 정관읍 용수리 산막 마을 이현사(二賢祠)에서 할아버지 김윤룡 장군과 함께 배향하고 있다. 또한 기장 향교에서 매년 음력 3월 10일 향제를 올리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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