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0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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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致和 |
영어음역 | Jeong Chihwa |
이칭/별칭 | 성능(聖能),기주(棋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112번길 61[수안동 421-56]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한문종 |
[정의]
조선 후기 동래 부사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성능(聖能), 호는 기주(棋洲).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5세손으로 아버지는 형조 판서 정광성(鄭廣成)이고, 어머니는 황근중(黃謹中)의 딸이다. 형은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이고, 사촌은 좌의정 정지화(鄭知和)이다. 부인은 의령 남씨(宜寧南氏)로 오위장 남정(南瀞)의 딸이다. 아들은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으로, 정태화의 막내아들을 입양하였다. 며느리는 효종(孝宗)의 딸 숙정 공주(淑靜公主)이다.
[활동 사항]
정치화(鄭致和)[1609~1677]는 1628년(인조 6)에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문한(文翰)[글을 짓는 일]과 삼사(三司)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고, 암행어사로 여러 지방을 감찰하였다. 1640년 세자시강원 보덕이 되어 청나라의 심양(瀋陽)에서 볼모 생활을 하던 소현 세자(昭顯世子)를 모실 때 세자가 서양 문물에 관심을 갖도록 북돋워 주었다고 한다. 정치화는 1642년(인조 20) 1월 16일 동래 부사에 임명됨으로써 품계가 통정(通政)으로 올라갔다. 그해 3월 공무목(公貿木)[일본과의 무역 대금으로 지급한 무명] 지급을 허락한 데 대한 감사의 뜻으로 쓰시마[對馬]의 사절 등지승(藤智繩)이 반종(伴從)[수행인] 및 격왜(格倭)[뱃사공] 등을 데리고 부산에 와 정치화가 접대를 하였다.
같은 달에 등지승과 서수좌(徐首座) 등이 언삼(彦三)의 도서(圖書)[조선 조정에서 쓰시마 측에 제공한 도장으로, 이것이 찍혀야 입국, 무역, 외교 문서를 전달할 있음]를 반납하고 언만(彦滿)의 도서로 바꿔 가는 일로 장계를 올렸다. 이때 조정에서는 언삼의 도서를 환수하지 말고, 언만의 도서를 새로 내 주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등지승 일행은 쓰시마 도주의 허락이 없다는 이유로 왜관에 보관해 두고, 언만의 도서만 가져갔다. 1642년(인조 20) 7월 형 정태화가 경상 감사에 임명되자 상피(相避)[친인척끼리 같은 부서에 있거나 송사를 맡거나 시험관이 되는 것을 금함]하여 동래 부사직을 퇴임하였다.
1645년(인조 23)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이듬해 일어난 강옥(姜獄)[임금이 소현 세자의 부인 강씨(姜氏)에게 사약을 내려 죽인 사건] 때 패초(牌招)[승지가 왕의 명령서를 가지고 신하를 부름]를 올리지 않은 죄목으로 파직되었다. 1647년(인조 25) 말 평안도 관찰사로 승진한 뒤 1650년(효종 1) 광주 부윤이 되고, 경기도 관찰사, 도승지, 강화부 유수를 거쳐 1657년(효종 8) 형조 판서에 올랐다. 1660년(현종 1)과 1664년(현종 5) 두 차례 동지사(冬至使)로 중국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1667년(현종 7) 우의정이 되기까지 10년 동안 육조의 판서와 대사헌을 역임하였는데, 현종(顯宗) 즉위[1659] 후 서인과 남인의 정쟁이 심해지면서 다섯 차례나 벼슬에서 물러나는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형 정태화가 영의정에서 물러나자 우의정 겸 의금부 판사가 되었고, 1668년 송시열(宋時烈)이 우의정이 되면서 좌의정에 올랐다. 중추부 판사를 거쳐 1677년(숙종 3) 9월 중추부 영사로 재임 중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