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0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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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釜山鎭城 |
영어의미역 | Busanjinseong Fortress |
이칭/별칭 | 부산포성,증산성,고하야가와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강식 |
[조선 전기의 부산진성]
1. 개설
조선 건국 후 경상도 해안을 방어하기 위해 부산포에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를 설치했다. 세종 때 경상 좌도(左道)의 부산포에 수군도안무처치사(水軍都按撫處置使)를 두고, 아래에 부산진 첨사영(釜山鎭僉使營)을 두었다. 세조 때 경상 좌도의 부산포 진관(鎭管)이 설치되었으며, 성종 때 부산포(釜山浦) 진성을 쌓았다. 부산포 진관은 왜인(倭人)을 접대하는 곳이어서 당상관(堂上官)을 파견하여 지키게 한 중요한 관방이었다. 임진왜란 때 부산 첨사 정발(鄭撥)이 일본군에 맞서 처음으로 격전을 벌인 현장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부산포 왜관의 동쪽에 왜성(倭城)을 활용하며 다시 성을 고쳐쌓아 부산진 첨사영으로 사용하게 되자 전기의 부산진성은 기능을 잃었다.
2. 건립 경위
고려 말부터 부산포 일대에는 왜구의 침입이 대규모로 늘어났다. 부산은 일본과 거리상으로 매우 가까운 지역이어서 왜구의 침략을 자주 당하자 1397년(태조 6) 동래진(東萊鎭)을 설치했다. 1403년(태종 3) 경상도 해안을 방어하기 위해 부산포에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를 두었다. 1421년(세종 3) 경상 좌도(左道)의 부산포에 수군도안무처치사(水軍都按撫處置使)를 두고, 그 아래에 부산진 첨사영(釜山鎭僉使營)을 두었다. 부산포에 거주하는 왜인에 대비하기 위해서 부산포에는 1485년(성종 16)경부터 일부 성보(城堡)가 수축되어 다른 포(浦)에서도 따르도록 하였다. 1490년(성종 21) 부산포 진성(釜山浦鎭城)이 완성되었는데, 둘레가 2,026척(尺)이었다. 조선 전기 부산진 첨사영에는 9척의 병선(兵船)과 2,200여 명의 군사가 배치되었다.
3. 위치
조선 전기의 부산진성은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에 위치한다. 조선시대의 기록에 동래현의 남쪽 21리에 있는데, 산의 형세가 솥과 같다고 했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부산포(釜山浦)와 닿은 곳에서부터 서북쪽으로 성곽이 있었다. 현재 좌천1동의 정공단에서 증산 체육공원이 있는 좌천 아파트 아래쪽에 걸쳐서 있었다.
4. 형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관방조(關防條)에는 둘레 1,689척, 높이 13척의 견고한 성으로 상주하는 왜호(倭戶)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부산진성은 부산포(釜山浦)에 인접하여 해수(海水)가 남문(南門) 부근까지 와 닿았는데, 한때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영도 부근에 있었다. 1510년 삼포왜란(三浦倭亂) 이후 부산포 왜관(倭館)에 대비하기 위해서 꾸준히 성보(城堡)가 증축되었다. 1525년에는 부산포 왜관 북쪽에 성을 쌓을 만한 곳의 외부에 소금가마가 있고, 성터의 너비가 두 마장[5리나 10리]에 불과한 곳에 성을 쌓았으며. 성의 북쪽에 관문(關門)을 만들어 왜인(倭人)과 섞이지 않도록 하였다. 1548년 부산포에는 담쌓는 승군(僧軍)이 600여 명이 있었다. 1591년(선조 24)에는 부산포의 성곽이 증축되고 참호(塹壕)를 설치하여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부산진성은 본성(혹은 모성(母城))과 이와 관련된 성곽의 일부이거나 왜관 주변부에 성곽 시설을 둔 형태로 운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까지 임진왜란 때 부산 첨사 정발(鄭撥)이 1592년 4월 14일(음력) 부산진성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운 첫 전투 장면과 부산진성의 위치 및 형태를 알려주는 자료로는 변박(卞璞)의 「부산진 순절도(釜山鎭殉節圖)」가 있다. 전투 당시의 시점을 화폭에 담아 그린 「부산진 순절도」에 보면, 해발 120m 증산 아래 정공단(鄭公壇) 일대의 본성에서 첫 전투를 하는 모습과 이와 관련된 성곽의 일부이거나 왜관 주변부에 성곽의 일부가 아래쪽에 그려져 있다. 이 기록화는 1658년(효종 9) 동래부사를 지냈던 민정중(閔鼎重)이 보았다고 언급하여 알려진 후, 1709년(숙종 35)에 그려졌던 원본이 낡아 형태를 알아보기 어렵게 되자, 1760년(영조 36) 동래부 화사(畵師) 변박이 이를 보고 다시 그린 역사기록화로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5. 현황
조선 전기의 옛 성터는 도시개발로 확인할 수 없지만, 원래 부산진성의 서북쪽에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쌓은 증산 왜성의 경사진 성벽과 성벽이 몇 겹으로 둘러쳐진 왜성의 흔적만 볼 수 있다. 이것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부산진성에 일대에 주둔하면서 기존의 우리나라 성곽을 허물고 일본식 성으로 쌓았기 때문이다. 일신기독병원 근처의 정공단(鄭公壇) 자리가 부산진성의 남문이며, 성문 가까이에 바다가 있었다는 사실을 「부산진 순절도(釜山鎭殉節圖)」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전기의 부산진성 서북 윗쪽에는 증산공원과 동구도서관 등이 자리하고 있다.
6. 의의와 평가
조선 시대의 수군 체계와 진성의 규모와 형태를 알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조선 전기에 부산 지역의 군사적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과 처음으로 전투를 치른 항전의 현장으로서 후대에 기억되면서 역사적으로 많은 영향을 남겼다.
[조선 후기의 부산진성]
1. 개설
조선 전기에 증산 아래 있던 부산진성이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의해 파괴되자, 1607년(선조 40) 부산포 왜관 터 옆으로 이전하면서 성곽을 고쳐쌓아 부산진 첨절제사의 본영으로 사용하였다. 성곽은 내성과 외성의 이중 구조였는데, 자성(子城)은 내성 안에 있었으며, 장대(將臺)를 자성대(子城臺)라고 하였다. 부산진성은 1895년(고종 32) 군제 개혁으로 폐지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2. 건립 경위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부산진성을 함락한 후 전기의 부산진성을 허물고 증산 왜성(혹은 부산왜성)을 쌓았으며, 동남쪽에 자성대 왜성을 쌓았다. 본격적인 축성은 1593년(선조 26) 3월부터 8월 사이였는데, 자성대 왜성은 아사노 나가마사[淺野長政]·아사노 요시나가[淺野幸長] 부자가 대부분 축성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1607년(선조 40) 전기의 부산진성이 파괴되어 사용하기 어렵게 되자 부산포 왜관이 있었던 터 옆으로 이전하면서 성곽을 다시 고쳐쌓아 부산진 절제사의 본영으로 사용하였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자성대 왜성의 정상에 자성을 만들고 장대(將臺)로 삼았기 때문에 자성대라고 불렸다. 또 『영남진지』에 보면 임인년에 자성 위에 육우정(六友亭)을 세우고, 승가(勝嘉)라는 이름을 내렸다. 이에 자성은 한 진(鎭)의 장대가 되고, 승가정은 자성의 장대가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후기의 부산진성은 내성과 외성의 구조로 되어 있었다.
한편 자성대는 1592년 일본군의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주둔하였다 하여 고니시성[小西城], 또는 마루야마성[丸山城]이라고도 불렀다. 또 정유재란 때 참전한 명나라 장수 만세덕(萬世德)을 기리는 공간이 조성되어 만공대(萬公臺)이라고도 불렀다.
3. 위치
조선 후기의 부산진성은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590번지 부산진성 공원에 위치한다.
4. 형태
조선 후기의 부산진성은 산쪽의 내성과 바닷가의 외성의 형태였는데, 내성에 자성(子城)이 있는 이중 구조였다. 『대동지지』에는 부산진성 둘레가 5,356척(尺), 『영남진지』 「부산진지(釜山鎭誌)」 성첩(城堞) 조에는 부산진성의 둘레가 1,108보(步)[6,648척], 성가퀴는 487토(吐)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서남북에 성문이 있는데 동문을 진동문(鎭東門), 서문을 금루관(金壘關), 남문을 진남문(鎭南門), 북문을 구장루(龜藏樓), 암문(暗門)은 교상각(橋上閣)이라 하였다. 성 안에는 객사(공신관) 등의 많은 관사와 시탄고(柴炭庫) 등 창고가 있었다. 특히 서문 좌우 우주석(隅柱石)에는 ‘(이곳은) 나라의 목에 해당하는 남쪽의 국경이며 서문은 나라의 자물쇠와 같다라는 뜻의 ‘남요인후(南徼咽喉) 서문쇄약(西門鎖鑰)’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부산진성을 자성대 왜성으로 옮기고 난 후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개발 과정에서 서문을 철거할 때 성남초등학교 교정으로 옮겨져 있던 것을 1975년 보수공사 때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현재 확인할 수 있는 대부분의 성벽은 부산진성 공원 정상 부분에 남아 있는 왜성이다. 해발 36m의 작은 구릉 상부의 평탄지에 남북 길이 130m, 동서 길이 80m의 성벽[왜성의 본환(本丸)]과 그 아래에 조성된 북쪽 일부 석축 성벽이 비교적 양호하게 남아 있다. 성벽은 최고 10m, 최저 1.5m 정도 높이인데, 성벽이 60∼70° 정도로 경사지게 축조되어 있어서 전형적인 일본식 성벽의 특징을 보여 준다.
5. 현황
비교적 잘 남아 있던 조선 후기의 부산진성은 일제 강점기에 성안의 군사 시설이 파괴되었으며, 전차 선로가 부설되면서 서쪽[오늘날의 부산진시장 일대]의 성문과 성벽이 크게 훼손되었다. 남쪽 바다는 매축되고, 북쪽은 도로와 시가지가 들어섰다. 동쪽도 매축되어 주거지와 선창이 들어서면서 옛 모습은 거의 사라졌다. 현재 부산진성의 외곽 성벽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부산진성 공원 내 정상부에 자성대 왜성의 본환(本丸)에 해당하는 성벽과 그 아래 일부 성벽이 남아 있다. 1974년 7월부터 1975년 2월까지 부산광역시에서 정화 복원 공사를 벌여 동문[진동문(鎭東門)], 서문[금루관(金壘關)], 산 정상부 남쪽 공간에 장대 진남루(鎭南樓)를 복원하였으며, 1975년 7월에는 동문의 성벽 일부도 복원하였다. 진남대 동남쪽에는 명나라 장수로 조선을 도우러 왔다가 조선에 귀화한 천만리(千萬里)의 후손이 세운 천만리 영양 천공비(千萬里潁陽千公碑)가 세워져 있다. 북동쪽에는 고려 후기 왜구를 물리쳤던 최영(崔瑩) 장군의 사당이 건립되어 있다. 2003년에는 동문 근처에 영가대(永嘉臺)가 복원되었다.
6. 의의와 평가
조선 전기에 증산 아래 있던 부산진성이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의해 파괴되자 조선 후기에는 부산포 왜관의 동쪽으로 이전하여 부산진성으로 사용하였다. 이를 통해 부산 지역의 관방 체제의 변화를 파악할 수 있으며, 성곽 교류사 측면에서 서생포왜성과 함께 조선에서 왜성을 활용하여 관방의 진성으로 사용했던 사례로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