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9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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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矢野桃郞 |
영어음역 | Yano Momoro |
이칭/별칭 | 시야도랑(矢野桃郞)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7가 20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전성현 |
[정의]
1939~1940년 부산 부윤을 지낸 일본인 관료.
[활동 사항]
야노 모모로[矢野桃郞][1894~?]는 1894년 11월 일본 도쿄[東京市 芝區 愛宕町]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7월 동경제국대학 법과 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고등 문관 시험에 합격하여 1922년까지 경시청 경부, 경시로 도쿄에서 근무하였다. 1922년 5월 조선총독부 경찰관강습소 교수 겸 조선총독부 사무관에 임명되어 조선으로 건너와 경성에서 근무하였다. 경부, 경부보 등 중견 경찰관으로 경력을 쌓은 후 1924년 경무국 사무관으로 조선총독부 고등경찰과에서 근무하고 평안남도 학무과장을 지냈다. 1926년 평안북도 재무부장으로 진급하였다.
1928년 경상남도 재무부장으로 발령 받아 부산에서 근무하면서 금융 조합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6개월 만에 충청남도 경찰부장으로 승진하고 경찰부장, 내무부장을 거쳐 1932년 2월 충청북도 내무부장으로 영전하였다. 1933년 3월 총독부 체신 사무관에 임명되어 체신국 보험 운용과장으로 간이 보험 적립금의 운용 범위를 확대하는 등 간이 보험을 알리고 보급하는 일에 힘썼다. 1935년 봄 전라남도 내무부장으로 옮겼다.
1937년부터 조선총독부 부윤으로 평양, 부산, 경성 등에서 근무하였다. 부산 부윤재임 기간은 1939년 8월 1일부터 1941년 7월 1일까지다. 이 시기는 1937년 치른 중일 전쟁 이후 전시 동원 체제가 강화되고, 부산부에서는 부산부회를 중심으로 하는 ‘자치 기구’의 기능이 점차 약해지던 시기다. 재임 초기 야노 모모로는 ‘부산부회 부의장 선거 오직(汚職) 사건’으로 인한 혼란을 잠재우는 한편, 식량 배급제 등 일제의 전시 동원 체제 방침을 성실히 수행하였다. 1942년 5월 17일 관직에서 물러났다.
[상훈과 추모]
조선으로 건너온 해인 1922년 종7위에 서훈되고, 부산 부윤을 그만둔 1941년 정5위 훈4등에 서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