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9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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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土屋傳作 |
영어음역 | Sseuchiya Densaku |
이칭/별칭 | 토옥전작(土屋傳作)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 2가 11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전성현 |
[정의]
1934~1936년 부산 부윤을 지낸 일본인 관료.
[활동 사항]
쓰치야 덴사쿠[土屋傳作][1891~?]는 1891년(고종 28) 3월 일본 야마나시 현[山梨縣 山梨郡 松里村]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쓰치야 류코[土屋龍子]이고 아들은 쓰치야 고이치[土屋光一]이다. 1914년 동경제국대학 농과 대학 수의학과를 졸업한 뒤 1916년 함경남도 축산 기술원으로 조선에 와 5년 동안 축우 개량 및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들여온 면양의 번식 및 사육법을 연구하였다. 1921년 2월 체신 서기가 되었으며 같은 해 10월 문관 고등 시험 행정과에 합격하여 전문 행정 관료로 나섰다.
1922년 4월 조선총독부 도속(道屬)에 임명되어 황해도 학무과장이 되었고, 1924년 함경남도 학무과장, 1927년 평안남도 지방과장에 이어 1928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근무하였다. 1929년 8월 황해도 경찰부장, 1930년 전라남도 경찰부장으로 전근하였다. 1932년 조선총독부 사무관으로 관방 외사과에서 근무한 뒤 신경(新京), 봉천(奉天)에서도 활동하였다. 1932년 함경북도 내무부장이 되어 북부 조선의 신항만인 나진항 건설과 북선 개척에 힘썼다.
1934년 5월 부산 부윤에 임명되었다. 부산 부윤 시절 도진교(渡津橋) 문제를 매듭지어 부산 대교를 준공, 개통하고 방송국 유치에도 나서 사단법인 조선방송협회 산하 부산연주소를 열었다. 1934년 4월 착공된 적기만 매축 공사를 마무리하였으며, 대홍수로 인한 피해 복구에도 힘썼다. 1936년 대구 세무 감독국장으로 옮긴 뒤 1938년 퇴관하였다. 이후 조선금융조합연합회 사업부장을 지내고 1945년 광복 전까지 조선금융조합연합회 이사로 활동하였다. 광복 후 일본 정부가 일제 때 조선에서 활동한 경제계 거두들을 공직에서 추방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1947년 공직에서 쫓겨났다.
[상훈과 추모]
1923년 종7위에 서훈되고, 1937년 정5위 훈5등, 퇴관 이후 종4위 훈4등에 서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