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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885
한자 蠶峰山城-
영어의미역 Site of Jambongsanseong Fortress
이칭/별칭 잠봉토성지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부산광역시 강서구 구랑동 산30|산31
시대 고려/고려
집필자 나동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성곽 터
소유자 개인
관리자 부산광역시 강서구청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6년~2007년연표보기 - 동아대학교 박물관이 문화재 지표 조사를 실시함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9년연표보기 - (재)경남문화재연구원과 복천박물관이 시굴 조사를 실시함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10년연표보기 - 동양문물연구원이 발굴 조사를 실시함
소재지 부산광역시 강서구 구랑동 산30~31
출토 유물 소장처 동양문물연구원 - 부산광역시 중구 부평동 4가 52-3지도보기

[정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구랑동에 있는 고려 시대의 토석 양축성.

[개설]

잠봉 산성(蠶峰山城)은 지형의 형세가 마치 누에고치와 같아 잠봉이라 불렀으며, 산성의 명칭도 잠봉 토성으로 부르고 있다. 김해에서 10㎞가량 떨어져 있고, 옛 김해만 및 낙동강과 2~3㎞가량 떨어져 있는 해안 지역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며, 일부 구간에서 판축 토성으로 성벽이 축조된 점으로 보아 고려 시대의 수(戍)[군사적 주요 거점에 설치된 일종의 감시 초소 역할을 하는 소규모의 성]로 추정된다. 고려 시대의 수는 둘레 100~200m의 토성 또는 석성으로 축조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995년(성종 14)에 단행된 지방 체제 개편으로 지금의 김해인 금주(金州)를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로 삼았다는 기록으로 볼 때, 잠봉 산성은 금주에 속한 수(戍)로서 해안과 이어지는 교통로를 감시하기 위한 성곽 유적으로 추정하고 있다.

[위치]

잠봉 산성 터강서구 구랑동 압곡 마을의 동남쪽에 돌출된 독립의 구릉성 야산에 위치한다. 남쪽 유적의 정상부는 54.1m이고, 북쪽으로는 골짜기를 지나 41.6m의 평탄면을 이루다가 북쪽으로 완만하게 떨어지는 지형을 보이고 있다. 강서구 구랑동 구랑 마을을 바라보는 동쪽 지역은 경사가 매우 급한 편으로 부산~진해 간 고속 국도와 연접해 있으며, 북쪽의 압곡 마을 쪽은 경사가 다소 완만한 계단상의 지형을 이루고 있다. 현재는 산업단지 조성으로 성곽이 멸실된 상태이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2004년 부산·진해 경제 자유 구역 산업 단지 및 배후 택지로 지정됨에 따라 2006년부터 2007년까지 동아대학교 박물관이 문화재 지표 조사를 실시하였으며, 2009년에는 (재)경남문화재연구원과 복천박물관이 공동으로 시굴 조사를 실시하여 건물 터로 추정되는 유구를 확인하였다. 2010년에는 동양문화재연구원이 부산도시공사의 의뢰를 받아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토성과 석축 구간으로 구성된 둘레 176m의 성벽이 확인되었으며 석축 구간에서 주초석이 잔존하는 문지 1개소, 입수 및 출수구의 배수 시설, 토축 구간에서도 문지 1개소와 추정 망루(望樓) 터가 확인되었다. 성벽 외곽에서는 구상 유구(溝狀遺構)[도랑상으로 구덩이를 판 시설] 및 수혈 유구(竪穴遺構)[땅을 파 내려간 구조물]도 확인되었다.

성벽은 동쪽의 석축 구간이 약 100m, 서쪽의 토축 구간이 약 76m이다. 동쪽의 석축 구간은 기단부를 포함한 너비가 450㎝, 잔존 성벽의 높이는 양호한 곳이 180㎝이다. 외벽은 풍화 암반층 위에 가로 80㎝, 세로 20㎝ 크기의 장방형 석재를 이용하여 기단을 조성한 뒤 그 상부로 40~50㎝ 크기의 면석을 수직상으로 쌓아 올려 축조하였다. 내벽은 가로 40㎝, 세로 30㎝ 크기의 장방형 할석을 이용하여 기단을 조성한 뒤 가로 25㎝, 세로 20㎝ 크기의 석재로 3~4단 정도를 쌓아 올린 형태이다. 내벽과 외벽 사이에는 20㎝ 내외의 할석을 채워 적심부(積心部)를 이루며 내벽 최하단석의 60㎝ 정도 안쪽으로 가로 30㎝, 세로 20㎝ 크기의 할석을 이용하여 축조된 배수로가 확인된다. 내벽 안쪽으로는 기반층 위에 적갈색 점토, 암갈색 사질 점토, 적갈색 사질 점토 순으로 보강토를 덧대었다.

서쪽의 토축 구간은 성벽의 너비가 5.5~6m 정도이다. 외벽은 가로 40㎝, 세로 20㎝ 크기의 할석을 이용하여 3단 정도를 10~20㎝ 정도 들여서 축조한 뒤 판축(版築)[성벽을 조성할 때 거푸집을 대고 진흙토와 마사토를 번갈아 넣어 다진 토성의 축조 방법]한 형태로, 성벽이 무너진 뒤 수축(修築)하는 과정에서 초축 기단 위로 가로 30㎝, 세로 20㎝ 크기의 할석을 이용하여 석축을 쌓았다. 석축에서는 4개의 영정주(永定柱)[토성 벽을 다지기 위한 거푸집 판을 고정시키는 역할을 하는 기둥] 흔적이 조사되었는데, 나무 기둥으로 영정주 간의 거리는 3.7~4m 간격이며 직경은 20㎝ 내외이다. 내벽은 크게는 70㎝, 작게는 30㎝ 크기의 석재로 4~5단을 계단상으로 토벽을 덮듯이 상단으로 갈수록 안쪽으로 들여쌓아 축조하였다. 석축 구간에서와 같이 내벽 최하단석의 60㎝ 정도 안쪽으로 가로 30㎝, 세로 20㎝ 크기의 할석을 이용하여 축조된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성벽의 부속 시설로서 문지 2개소가 확인되었다. 서쪽 모서리 석축 구간에서 확인된 동문지의 너비는 480㎝이고, 정면 1칸, 측면 3칸이며, 초석 간의 거리는 50~60㎝로 문지 바닥은 계단상을 이루고 있다. 문지 중앙부에서는 폭 40㎝의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토축으로 축조된 구간의 남쪽에서는 토축 성벽과 석축 성벽이 약 550㎝의 너비를 이루며 어긋나게 축조되어 있어 문지로 추정되며, 토축 구간 쪽으로 판축 성벽 안팎에 가로 110㎝, 세로 80㎝ 크기의 대형 초석 등이 확인되어 망루(望樓)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동남쪽 석축 구간에서 확인된 수구는 동문지에서 약 5.5m 지점에서 확인되었다. 외벽 출수구는 가로 35㎝, 세로 35㎝, 내벽 입수구는 가로 40㎝, 세로 15㎝ 크기로 내외 입수구와 출수구 간의 고저 차이는 150㎝이다. 입수구의 안쪽 좌우에는 너비 50㎝의 석렬 안쪽 바닥에 가로 20㎝, 세로 15㎝ 크기의 할석이 깔려 있는 배수로가 조사되었다.

서쪽 성벽에서는 수혈 유구와 구상 유구가 확인되었는데, 약 10m 바깥에서 조사된 구상 유구는 단면 V자 형을 이루고, 너비는 약 3~5m이고 잔존 깊이는 1.2~2m이다. 구릉 경사면에서 확인된 수혈 유구는 평면 원형 및 장타원형이고, 크기는 각각 가로 210㎝, 세로 150㎝, 가로 300㎝, 세로 150㎝, 가로 730㎝, 세로 260㎝ 정도이다. 구상 유구와 수혈 유구를 보아 성벽 축조 이전에 환호 집락(環壕集落)[일종의 방어시설인 호(壕)를 두른 마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잠봉 산성 터에서는 주로 기와편 및 자기편이 출토되었다. 초축 성벽 사이에서 출토된 기와편에는 통일 신라 시대까지 소급될 수 있는 기와편도 보이나, 기와의 문양이 대부분 어골문(魚骨文)이며, 네모문[방곽문(方廓文)]·수레바퀴문[차륜문(車輪文)]·창살문[격자문(格子文)] 등으로 고려 시대의 것이다. 복합문 중에는 어골문과 네모문이 결합된 문양이 많이 출토되었다. 자기류는 청자편, 백자편 및 분청사기편이 출토되었다.

[현황]

현재 잠봉 산성은 부산·진해 경제 자유 구역 산업 단지 및 배후 택지 개발로 인해 삭평되고 없는 상태이다.

[의의와 평가]

부산과 경상남도 지역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고려 시대의 수(戍)의 성격을 띠는 유적으로, 특이하게 토축과 석축으로 쌓은 토석 양축성(土石兩築城)이다. 축조 수법과 함께 고려 시대의 관방 연구에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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