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8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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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釜山浦海戰 |
영어의미역 | Naval Battle in Busan-po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제장명 |
[정의]
1592년 9월 1일 조선 수군이 부산포에서 일본군을 공격하여 크게 승리를 거둔 해전.
[역사적 배경]
조선 수군은 부산성 동쪽 언덕 밑 3개소에 일본군선 약 470여 척을 맞아 하루 종일 교전하여 적선 100여 척을 3도의 여러 장수들이 힘을 모아 깨트리는 전과를 거두었다. 부산포 해전 직전에 경상 우도 순찰사 김수는 공문을 보내 “일본군이 양산과 김해 등지로 내려오는데, 도망치려는 것 같다”는 정보를 제공하였다.
이것은 사실상 한산대첩의 패배로 바다를 통한 보급 지원이 무산된 일본군이 육지를 통한 서진(西進)을 위해 호남의 관문인 진주성을 공격하고자 북상했던 일부 병력을 소집한 것이었다. 그러나 외관상으로는 일본군이 바다를 통해 물러나려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김수는 이러한 사실을 전라 좌수사 이순신(李舜臣)에게 전달하였다. 이 때문에 전라도의 조선 수군은 출항을 서둘러 8월 24일에 전라 좌수영을 출발, 제4차 출전을 시작하였다.
[경과]
전라좌우수군은 1592년 8월 24일 전라 좌수영을 출발한 후 8월 25일 경상우수군과 연합하여 총 판옥선 74척 이상, 협선 92척 이상이 출전하였다. 이때 배의 숫자는 전라좌수군과 전라우수군 소속의 전선 숫자이다. 명확한 숫자가 밝혀지지 않은 것은 원균(元均)이 거느린 경상우수군의 전선 숫자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50일 전에 있었던 한산도 해전 때의 7척보다는 늘어났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조선의 연합 함대는 당포, 원포, 가덕도의 선창을 거쳐 8월 29일에는 동래 장림포 앞에서 첫 전투를 벌여 일본군선 6척을 격침시켰다. 이후 가덕도 북변에서 밤을 보낸 후 9월 1일 새벽에 발선하여 화준구미에서 일본군선 5척을, 다대포 앞바다에서 8척을, 서평포 앞바다에서 9척을, 절영도 앞에서 2척을 만나 모두 격침시켰다. 이후 탐지한 결과 대개 일본군선 500여 척이 부산 앞바다의 선창에 포진하고 있는데 그중 선봉대선 4척이 초량목으로 마주 나오고 있다하므로 녹도 만호 정운을 비롯한 5명의 장수가 이들을 공격하여 모두 격침시켰다.
초량목 전투 이후 조선 수군은 ‘장사진(長蛇陣)[‘뱀처럼 길 게 늘어선 군진(軍陣)’이란 뜻으로 『손자병법(孫子兵法)』에 나오는 말]’을 펼친 가운데 계속 전진하여 부산성 동쪽 한 산에서 5리쯤 되는 언덕 밑 3개소에서 일본의 대중소선 약 470여 척을 만났다. 적은 우리의 위세를 바라보고 두려워서 감히 나오지를 못하고 있다가 우리 수군이 그 앞으로 돌진하자 일부는 배를 버리고 산으로 올라 6개 처에 나누어 대진하였다. 이에 조선 수군들은 천자·지자 총통·장군전·피령전·장편전·철환 등을 발사하면서 하루 종일 교전하여 적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그 결과 적선 100여 척을 3도의 여러 장수들이 힘을 모아 깨트리는 전과를 거두었다.
[결과]
부산포 해전의 결과 8월 29일에 있었던 장림포에서 6척을 격침시킨 것을 포함할 때 9월 1일에 있었던 여러 곳에서의 서전과 부산포 본전에서 격침시킨 적선의 숫자는 134척 이상으로 집계할 수 있다. 반면에 조선 수군은 단 1척의 격침된 전선이 없었지만 부분적으로 파손된 전선은 일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인명 피해는 다수 발생하였다. 전라 좌수군 녹도 만호 정운이 전사하였고, 그 외 전사 6명과 부상 25명이라는 인명 피해를 입었다. 전라 우수군과 경상 우수군도 이에 준한 어느 정도의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의의와 평가]
부산포 해전은 이전의 해전과는 달리 일본 수군의 근거지인 부산포를 공격했다는 점과, 참전 규모와 그 전과가 임진년 시기 해전 중 가장 컸다는 점에서 해전사적인 의미가 크다. 또한 이전부터 일본 수군이 조선 수군을 회피하면서 해전 때마다 도주를 일삼았지만, 부산포 해전 이후에는 해안에 축성(築城)한 뒤 육상에서만 조선 수군을 상대하려는 해전 회피 전법이 고착화되었다. 이 때문에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향후 수륙 합공 작전이 필요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