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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696
한자 殉亂士民碑
영어의미역 Monument for the Deceased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부산광역시 사하구 윤공단로 112[다대동 1234]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양흥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834년 8월연표보기 - 순난사민비 건립
이전 시기/일시 1970년 - 윤공단으로 이전
문화재 지정 일시 1972년 6월 26일 -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9호로 지정
현 소재지 윤공단 -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1234지도보기
성격 비|순난비
관련인물 윤흥신
크기 61㎝[높이]|23㎝[너비]|19㎝[두께]
소유자 부산광역시청
관리자 부산광역시 사하구청
문화재 지정번호 부산광역시 기념물

[정의]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에 있는 조선 후기 임진왜란 때 다대진성 전투에서 사망한 다대진 백성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개설]

1592년(선조 25) 4월 13일 부산진성을 함락한 일본군은 4월 14일 군대를 나누어 동래읍성과 다대진성을 공격하였다. 당시 동래 지역의 수군 최고 지휘자인 경상 좌수사 박홍(朴泓)이 성을 버리고 도망간 탓에 다대진성의 지원군은 없었다. 그리하여 다대진 첨사 윤흥신과 사졸(士卒), 일반 백성은 온 힘을 다하여 대항하였지만 참혹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충렬사지(忠烈祠志)』 권11 ‘윤공단(尹公壇)’에는 1765년(영조 41) 당시 다대진 첨사이던 이해문(李海文)이 다대진 전투에서 순절한 사민(士民)을 기리기 위해 단소(壇所)를 마련하고 쓴 축문인 「서단 축문(西壇祝文)」이 있다. 순난사민비(殉亂士民碑)는 1834년(순조 34) 8월 다대진성 전투에서 순절한 일반 백성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건립 경위]

비의 명문(銘文)을 통해 비의 건립 연대는 알 수 있으나, 세워진 경위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18세기 중엽 이후부터 동래 지역에는 임진왜란 관련 인물과 장소에 대한 현창 사업이 활발해졌다. 순절한 인물들의 단소가 건립되었고 「동래부 순절도」, 「부산진 순절도」 등 그림도 그려졌다. 1834년 6월에는 「부산진 다대진 순절도」[「임진전란도」,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가 그려졌는데, 이러한 다대진 현창 사업의 일환으로 비가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

[위치]

현재 비는 윤공단 내에 있는데, 원래 다대포초등학교 안에 있다가 1970년 윤공단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질 때 함께 이전되었다. 소재지 주소는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1234번지이다.

[형태]

비의 규모는 높이 61㎝, 너비 23㎝, 두께 19㎝이며 받침돌이 있다.

[금석문]

비의 앞면에는 ‘순난사민비(殉亂士民碑)’라고 적혀 있고, 측면에는 비의 건립 시기를 알 수 있는 “숭정기원후사갑오 팔월 일 칠□(崇禎紀元後四甲午八月日七□)[숭정 기원 후 네 번째 갑오년(1834) 팔월]”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다.

[현황]

윤공단에는 중앙에 첨사 윤흥신 순절비(僉使尹興信殉節碑)가 있고, 좌우에 윤흥제 비(尹興悌碑)순난사민비가 있다.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9호로 지정되었으며, 부산광역시가 소유하고 부산광역시 사하구청이 관리한다.

[의의와 평가]

순난사민비는 자기 고장을 지키고자 한 일반 백성의 숭고한 애국과 애향 정신을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1.06.10 수정 문화재 지정 명칭 변경->다대포 객사->다대진 동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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