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6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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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交隣提醒 |
영어음역 | Gyorinjeseong |
영어의미역 | Reawakening from Bilateral Relation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손승철 |
[정의]
1728년 부산에서 조선 외교를 담당했던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가 저술한 일본의 조선 외교 지침서.
[저자]
아메노모리 호슈[1668~1755]의 자는 백양(伯陽)인데 통칭 동오랑(東五郞)으로 불린다. 1668년 일본 오우미[近江] 이카[伊香] 아메노모리[雨森][현재의 사가 현 타가츠기죠[高月町]]에서 태어나 17~18세에 에도[江戶]로 가서 당시의 대학자 기노시다 쥰앙[木下順庵]의 문하생이 되었으며, 그의 추천으로 1689년에 쓰시마 번[對馬藩]에 채용되었다. 1698년(숙종 24) 조선 관계 업무를 담당하는 조선어지배(朝鮮御支配)에 임명되었고, 나가사키[長崎]와 부산[1703~1705]에서 유학하였다.
이후 참판사의 도선주와 재판(裁判)으로 조선을 왕래하였고, 1711년(숙종 37)과 1719년 통신 사행 때는 쓰시마 번의 진문역(眞文役)으로 통신사 일행을 에도까지 수행하였다. 이러한 경력을 통해 조선 외교 전문가가 된 아메노모리 호슈는 많은 저서와 의견서를 남겼는데, 『왜어류해(倭語類解)』, 『교린 수지(交隣須知)』[1703경], 『교린 시말 물어(交隣始末物語)』[1714], 『교린제성(交隣提醒)』[1728], 『성신당기(誠信堂記)』, 『방주료간서(芳洲了簡書)』, 『치요관견(治要管見)』[1753], 『たはれ草』 등이 있다.
[편찬/간행 경위]
『교린제성』은 아메노모리 호슈가 61세이던 1728년(영조 4) 일본의 대조선 외교의 지침서로 작성하여 쓰시마 번주에게 제출한 것이다. 아메노모리 호슈는 이 책에서 외교·통상·상호 인식 등 모두 54개 항목을 서술하였는데, 조선과의 외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조선의 풍속 및 관습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형태/서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은 필사본으로 간사자와 간사지는 미상이다. 2권 1책이며, 26.8×17.2㎝ 이다. 여러 종류의 판본이 있는데, 현재 5종이 파악되었다. 일본 시가 현 다카츠키죠 아메노모리 기념관 소장 우삼방주(雨森芳洲) 문고본, 동경대학 사료편찬소 소장본, 쓰시마 구이즈하라죠[舊嚴原町] 중앙공민관 소장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국사편찬위원회 소장본 등이다.
[구성/내용]
본문은 별도의 제목 없이 54개 내용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해 보면, 일본이 조선과 교제할 때 유념할 사항, 특허 상인들에 대한 사무역, 철공철시, 공작미 지급, 공작미의 품질과 도량형, 송사(送使)의 구분, 겸대 송사(兼帶送使), 일본 사신에 대한 조선의 접대, 쓰시마 사람들이 조선에서 받는 접대, 일본인에 대한 조선 역관 근무지 접근 금지, 통역의 중요성, 통역의 역할, 조선의 풍습, 조선과 일본의 기호 차이, 관직명의 차이, 복식, 관에 대한 인식, 매의 헌상 문제, 기록의 중요성, 거짓 서계의 작성 이유, 조선인 송환 절차, 통신사 접대 문제, 통신사 출선 문제, 통신사와 쓰시마, 통신사 휘호 문제, 통신사 창화 청탁, 교토 대불전 참관 거부, 조선인과 일본인의 인식의 차이, 통신사 접대 때 이견 문제, 조선 측 역관에 대한 취급, 송사의 임무, 일본의 무력에 대한 조선의 경계, 인국의 개념, 왜관 땔감을 쌀로 대신하는 문제, 교간 문제, 예하정(禮下程)과 별하정(別下程), 역관의 인품, 송사 첨관(僉官), 조선과 일본의 되[升] 차이, 왜관 연향, 첨관의 대리인, 주급(周急)과 구질(救質), 예의지국 공작미 미수 문제, 공목과 공작미, 공작미 지급 연한, 표류민 접대, 일본인의 왜관 출입, 교간 처벌, 동래부 문제, 왜관 범죄, 조선인을 상대할 때의 유념 사항, 동래 부사의 지위, 성신 교제의 의미 등이다.
[의의와 평가]
『교린제성』은 아메노모리 호슈가 40여 년간 대조선 외교의 경험을 토대로 편찬한 외교 지침서로, 당시 조일 관계의 여러 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특히 일본인들이 대조선 외교를 어떠한 자세로 임했는지 알 수 있다. 양국 간의 교제에 성신(誠信)을 강조했다는 점에 있어 현재까지 높이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