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6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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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天若 |
영어음역 | Choe Cheonyak |
이칭/별칭 | 최천약(崔天躍),최천약(崔千若),최천약(崔千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용범 |
[정의]
조선 후기 부산 출신의 과학 기술자이자 관료.
[개설]
최천약(崔天若)은 숙종과 영조 대에 과학 기술 분야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펼친 인물이다. 최천약(崔天躍), 최천약(崔千若), 최천약(崔千約) 등으로도 불린다. 『영조실록(英祖實錄)』, 『일성록(日省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비롯한 각종 의궤(儀軌)에 이름이 남아 있다. 그는 숙종 대 이미 각종 천문 기계를 제작하였으며, 이후 영조의 명령을 받들어 독자적으로 자명종을 제작하고, 그 외 무기를 비롯한 각종 기계를 제작한 기술자였으며, 자와 악기를 비롯하여 온갖 조각품을 만들었다. 또한 국가적 공사였던 왕릉 건설에도 활발하게 참여하였다.
[가계]
최천약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동래 지역설과 웅천(熊川) 지역설이 있으나 그의 아들이 동래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동래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대략 1684년(숙종 10) 전후로 태어나서 1755년(영조 31)경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활동 사항]
최천약은 동래 출신 평민으로, 중앙의 관청에 발탁된 것은 1711년(숙종 37)에 조태억(趙泰億)이 통신사로 일본에 갈 때 정사(正使)가 탄 배의 반전차지(盤纏次知)로 수행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후 1713년(숙종 39) 조태구(趙泰耇)의 천거로 중국에 가서 천문 기기 제작법을 배우기도 하였다. 최천약은 조태구가 천거할 당시 이미 도감에서 옥을 가공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었고, 1713년 이래 1753년(영조 29) 무렵까지 40여 년간 옥인의 제작에 참여하여 20여 개 이상의 옥인을 제작하였다.
1731년(영조 7)부터는 왕실의 능묘의 석물을 조각하거나 능묘 조성의 공사를 감독하였다. 왕실의 능묘는 매우 중요한 국가적 역사였는데, 그는 늘 중심적인 인물이었다. 왕실 능묘 조성에서 그의 활동을 간략히 살펴보면 1731년에는 인조(仁祖)와 인열 왕후(仁烈王后)의 장릉(長陵)을 옮길 때 병풍석(屛風石)의 설계와 조각, 1739년(영조 15) 단경 왕후(端敬王后)의 온릉(溫陵) 석물 감동(監董), 1752년(영조 28) 의소 세손(懿昭世孫)의 의령원(懿寧園), 1753년 숙빈 최씨(淑嬪崔氏)의 소령원(昭寧園) 석물 들을 감동하였다.
그가 이처럼 각종 조각을 비롯하여 자명종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솜씨를 발휘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초량 왜관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다. 즉, 동래 지역민이었던 그는 일찍부터 왜관에 드나들면서 자명종의 원리나 무기 제작의 기술을 왜인들로부터 배웠으며, 중앙 관청에 소속된 이후 중국의 과학 기술을 견문함으로써 과학과 기술에 대한 이해가 한층 높아졌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그의 활동 영역은 단지 조각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하였듯이 의학 치료를 위해 필요한 동인(銅人)을 제작하기도 하고, 1742년(영조 18)에는 장악원 정(掌樂院正) 이연덕(李延德)과 함께 세종 조의 보루각(報樓閣) 제도를 복구하는 사업을 맡아서 물시계를 제작하는 등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있다.
[저술 및 작품]
최천약은 1730년(영조 6) 약원(藥院)에서 사용할 정교한 동인(銅人)을 만들고, 1731년에는 자명종을 제작하였다. 특히 자명종 제작과 관련하여 홍수해(洪壽海), 나경훈(羅景勳)과 함께 일류 자명종 제작자로 알려졌다. 그의 업적 중 특기할 만한 것으로 유척(鍮尺)의 제작을 들 수 있다. 유척은 조선 시대 도량형 제도상 척도의 표준으로, 지방 수령이 전정·군정·환곡 등을 규정대로 관리하는지 살필 때 사용하는 중요한 도구였다. 현재 덕수궁 궁중유물전시관에는 이 무렵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유척이 있는데, 길이 246㎜, 폭 12㎜, 높이 15㎜의 4각 기둥 형태에 자의 한 면에는 예기척과 주척을, 나머지 3면에는 포백척·영조척·황종척을 각각 새겨 두고 있는데, 오늘날의 정밀 측정치와 거의 차이가 없을 만큼 정교하다.
또한 최천약은 나라의 의례에 쓰일 편경과 편종 같은 정교한 악기를 제작하는 데도 참여하였다. 1741년(영조 17) 악기조성청을 설치하여 악기 일체를 만들 때 감독을 맡았다. 악기 중에서도 편경과 편종은 만들기도 어렵지만 제작한 뒤에 조금이라도 오차가 발생하면 고른 음률을 기대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특별한 제작 기술이 요구되었다.
한편 국가로부터 무반직을 받고서 무인으로 활동하였던 만큼 최천약은 무기 제작에도 관심을 기울여 획기적인 신무기를 개발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이덕리(李德履)는 선자포(扇子砲)라는 신무기를 고안하였는데, 이 무기는 최천약이 만든 총차(總車)를 개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훈과 추모]
1718년(숙종 44), 1721년(경종 1), 1722년(경종 2) 책봉례나 예장(禮葬) 등 왕가의 행사에서 옥인(玉印)을 조성하는 기술자로 봉직하면서 여러 차례 포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