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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210
한자 德浦場
영어의미역 Deokpojang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지명/고지명
지역 부산광역시 사상구 덕포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변광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오일장|장시(場市)
관련문헌 『공문일록(公文日錄)』
비정 지역 부산광역시 사상구 덕포동

[정의]

부산광역시 사상구 덕포동에 있던 덕포 나루에서 조선 후기 열린 오일장.

[개설]

장시(場市)는 상인들과 일반 백성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물화의 교역장이었다. 지방의 장시는 월 6회씩 5일 간격으로 열리는 것이 원칙이었다. 장시의 발달은 국지적인 시장권 형성과 함께 각 도를 넘어 전국적으로 지역 간 물화 유통의 발달을 가져왔다. 덕포장(德浦場·德圃場)에 주로 출시되는 상품은 농업 생산물과 어염(魚鹽)이 중심이었고, 나아가 수공업품 및 일상 필수품 등이었다.

덕포장 외에도 동래읍내장, 부산장, 좌수영장, 구포장, 독지장 등이 있었다. 특히 덕포장하단장, 구포장과 함께 낙동강 하구의 물화 유통 체계를 영남 내륙에 연결하는 데 큰 기능을 하였다. 심지어 낙동강 수운을 통하여 상주까지 연결되면 육로로 문경 새재를 넘어 충주 남한강에서 서울의 한강으로 이어지는 세곡과 상품 수송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명칭 유래]

덕포(德浦)라는 지명은 바위 언덕과 강선대(降仙臺)가 있는 마을로 ‘배가 들어온 갯가’라는 뜻이 담겨 있다. 덕포의 원래 이름은 ‘덕개’이며, 덕은 ‘언덕’에서 따온 말로 언덕 끝에 배를 대는 포구라는 의미의 덕포가 되었다. 그리고 ‘덕’은 글자 뜻대로 크다는 뜻이 담겨 있어 동서 양쪽 강선대와 바위 언덕이 있는 이 일대가 옛날 배가 와서 닿을 수 있을 만큼 큰 갯가 포구이었기 때문에 ‘덕개’ 또는 ‘덕포’가 되었다는 유래가 있다.

[형성 및 변천]

『공문일록(公文日錄)』에 “동래부 사상면은 사람은 많고 땅은 협소한 탓에 곡물류가 생산되지 않아 다른 지역에서 곡물을 운송해 와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사상면은 낙동강 하류에 위치하므로 덕포에 장을 설치하여 물품을 교역하면 이러한 폐단이 해소된다”라고 하고 있다. 덕포장은 일제 강점기 때 활성화하였으나, 지역의 유두강[샛강]의 흐름이 좋지 않고 인근의 큰 장인 구포장 등이 있어 자연적으로 쇠퇴하였다. 덕포장에서 약 100m 떨어진 곳에 현재 덕포 시장이 형성되어 있어 덕포장의 명맥을 잇고 있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유두강 주변에 덕포장이 형성되었다. 지금은 토지 개발로 삼락천이 형성되어 있으며, 인근에 홈플러스 등이 들어서 있다.

[관련 기록]

『공문일록』제3책 1893년[계사(癸巳)] 5월 5일에 “사상 한 면은 낙동강 하류에 있는데 청도·밀양의 곡물을 배로 운반하는 것이 편리하기 때문에 건륭 연간[1736~1795, 영조 12~정조 19]에 덕포장 선(船)이 설치된 까닭이다. 해산물과 곡물의 상호 교역은 한 달에 6회 장이 열리면 기일에 맞추어 왕래하여 저자마다 판매한다[沙上一面 處在洛江下流 淸道密陽穀物 船運其便故 奧在乾隆 所以有德圃場船設置之擧矣 海産土物 互相交易 一月六場 趁期來往 發賣各市]”라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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