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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126
한자 朝鮮時代-住居
영어의미역 Dwellings of the Joseon Dynast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장경준

[정의]

조선 시대~한말 동래 지역의 주거 문화.

[개설]

조선 시대 동래에 부임한 부사나 수사는 『가좌책(家座冊)』을 작성해 치민(治民)의 자료로 활용하였다.『가좌책』은 동임(洞任)의 책임 하에 작성하되 호 내 남녀별 인구수·나이·역, 노비 및 고노비의 수·나이·역, 가사(家舍)의 형태와 칸수, 전답의 두락 수, 우마(牛馬)의 필수, 부정(釜鼎)의 좌수, 현재 보유하고 있는 곡물의 수량 등을 상세히 기록토록 하였다. 이처럼 『가좌책』은 호적처럼 일정한 원리에 의해 작성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가세(家勢)를 있는 그대로 상세히 파악하고 있다.

따라서 『가좌책』이 있다면 조선 시대의 가옥 형태와 규모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 시대 동래와 관련된 『가좌책』은 현전하지 않는다. 이에 이하에서는 『가좌책』 대신에 가옥에 관한 사항이 기재되어 있는 『경상남도 동래부 무신조 장적(慶尙南道東萊府戊申條帳籍)』[이하 『동하면 호적』으로 약칭함]을 통해 당시의 가옥 형태와 규모를 대략 살펴보기로 한다.

[가옥의 형태]

『동하면 호적』은 1908년에 작성된 신식 호적으로 총 392호가 등재되어 있다. 이 중 가택란이 기재된 호는 388호인데, 이들 호의 가옥 형태는 모두 초가(草家)이며 와가(瓦家)는 전혀 없다. 『동하면 호적』보다 4년 앞서 작성된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慶尙南道東萊郡家戶案)』을 살펴보면, 동래군 8개 면[읍내면·서하면·사상면·사중면·동평면·남하면·남상면·동상면] 4,779호 가운데 와가인 호는 89호[1.9%]가 확인되며, 이 중 80호가 상업호가 많았던 읍내면·동평면·사중면 등 3개 면에 집중되어 있다.

이 같은 사정으로 미루어 볼 때 18~19세기 초중반의 가옥 형태 역시 20세기 초의 그것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와가의 비율은 20세기 초보다 더욱 낮았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18~20세기 초 동래의 지배적인 가옥 형태는 초가였으며, 와가의 비중은 극히 낮았던 것으로 보인다.

[가옥의 규모]

『동하면 호적』가택란에 기재된 388호의 가옥 규모는 최소 1칸에서부터 최대 8칸까지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 중 2~3칸 가옥이 전체 388호 중 235호[60.6%]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 4~5칸 가옥이 94호[24.2%]로 그 뒤를 잇는다. 이에 비해 6칸·7칸·8칸 가옥은 각각 35호[9.0%]·22호[5.6%]·1호[0.3%]에 불과하다. 이처럼 동하면 가옥의 84.8%는 2~5칸의 규모를 보이는데, 이 중에서도 2~3칸의 규모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1호당 평균 가옥 칸수는 3.62칸, 인구 1인당 평균 가옥 칸수는 0.80칸을 각각 나타낸다. 이는 1904년 당시 경상남도 전체의 호당 평균 가옥 칸수인 2.75칸 보다는 크지만 개성부 북부 이정리, 인천 답동, 전라북도 전주군 이남면, 경기도 광주군 북방면 등에는 못 미치는 수준이다.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을 통해 동래 전체의 사정을 살펴보면, 동하면의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동래군 8개 면 4,779호 중 2~3칸 가옥은 3,848호로 80.5%, 4~5칸 가옥은 829호로 17.3%, 그리고 6칸 이상은 102호로 2.2%를 각각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즉,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이 작성된 1904년 당시 동래에는 앞서 살펴본 동하면의 경우처럼 2~3칸 가옥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가옥의 소유와 임차]

『동하면 호적』에 등재된 388명의 호주들은 모두 호 내의 가옥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가옥의 전체 또는 일부를 타인에게 대여·임대하지 않고 자신이 가옥 전체를 점유·사용하고 있었다. 이처럼 388명의 호주들이 가옥 소유자란 점은 이들이 가옥만을 소유한 가주(家主)이거나 가옥과 대지를 함께 소유한 가대주임을 말해준다. 실제로 『동하면 호적』의 호주들 중에는 1904년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에서 가주와 가대주로 확인되는 자들이 많다. 그러나 동하면 이외의 면, 특히 상업호가 많았던 3개 면의 경우 동하면과 사정이 달랐을 수 있다.

19세기말 인천 외동의 경우 전체 225호의 가옥 총 칸수 2,117칸 중 기유는 와가 128칸, 초가 1,862칸이었으며, 차유는 와가 16칸, 초가 111칸이었다. 전체 가옥 칸수의 6%를 가옥의 소유주가 아닌 자들이 점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이 지역의 기구·고용은 전체 인구 1,062명의 16.2%인 172명이었는데, 소유주들 중 이들에게 가옥의 일부를 빌려주는 경우가 많아 차유 가옥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상업이 발달한 지역이라고 해도 그 정도는 조금씩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일례로 개성 도조리나 인천 답동의 경우, 차유 가옥의 규모가 외동의 그것에 미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종합해 볼 때 동래에서도 상업이 발달한 지역의 면은 그렇지 않은 면에 비해 차유 가옥이 많았으리라 여겨지며, 상업이 발달한 면 사이에도 그 규모는 조금씩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동하면 호적』에서는 가옥 소유자인 호주 외에 기구·고용과 같이 가옥을 소유하지 못한 무주택자도 확인된다. 이들은 가옥 소유주인 호주와 같은 가옥에서 동거하며 그에 의지해 삶을 영위해 나갔을 것으로 보인다. 이전 시기에도 무주택자의 존재가 확인되는데, 이들은 창원 구씨 집안의 호구 단자에서 보이는 협호와 『사상면 호적』에서 보이는 호수의 호에 솔거하고 있는 방계 친족들이다. 이들이 가옥을 임차하였는지, 아니면 무상으로 빌려 사용하였는지는 구분하기 어렵지만 『사상면 호적』에 보이는 41호 내의 방계 친족들은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추후 더 많은 자료가 발굴되어야 확인이 가능하겠지만 일단 『동하면 호적』과 『사상면 호적』에 한정해 볼 때 무주택자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상업호가 많은 3개 면의 경우, 보다 많은 무주택자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동래 전체를 놓고 보면 역시 그 비율은 그다지 높아 보이지 않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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