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0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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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國時代-騎乘文化 |
영어의미역 | Horse-riding Culture of the Three Kingdoms Perio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이상율 |
[정의]
부산 지역에서 발굴된 마구와 장신구를 통해 살펴보는 삼국 시대의 기승 문화.
[개설]
고대 사회에서 말의 가축화가 인류의 활동 폭을 넓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말이 지닌 뛰어난 기동성을 이용하여 지역 집단 간의 정보 교류를 촉진시키고 군사적 목적으로도 자주 이용되어 결과적으로 사회 체제의 확립이나 통폐합을 이끌어내는 데 말이 유용하게 활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적용 가능한데, 그중에서도 특히 삼국 시대에는 기승 문화가 가장 활발하게 발달되었다. 이것은 이 시기의 유물로서 말을 직·간접적으로 제어하는 다양한 마구(馬具)의 존재를 통해서도 입증된다.
이처럼 고대의 기승 문화를 통해 당시의 정치·사회적 변화와 맥락을 엿볼 수 있는 만큼, 직접적으로 말을 부리거나 장식하는 도구인 마구를 통해 고대의 중요한 정보를 파악할 수 있는 점에서 마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그중에서도 특히 삼국 시대에는 고대 국가의 형성 및 체제 유지와 맞물려 각종 다양한 기승용 마구가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는데, 뛰어난 기동성을 발휘할 수 있는 기승용뿐만 아니라 위세적(威勢的) 요소를 지닌 장식용도 함께 발달한 특징이 있다. 따라서 특정 지역에서 이들의 존재는 곧 그 사회 문화적 성격이 무장적이고, 권위적인 것을 의미함은 물론, 이들의 분포상을 통해 지역 간의 공간적인 관계를 규명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변천]
우리나라에 마구가 출현하는 것은 낙랑군(樂浪郡) 설치 이전부터이지만, 이는 말을 타고 전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수레 등을 말에 연결하여 이용하는 거마 문화(車馬文化)였다. 낙랑군 설치 이후 종래의 거마 문화가 한식 마구(漢式馬具)로 전환되는 가운데 양자가 결합하여 독특한 낙랑 마구(樂浪馬具)가 완성되었다. 삼한은 그 영향을 받아 마구를 제작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후기에는 독특한 형식으로 이를 변용하기에 이른다. 당시의 마구는 아직도 재갈을 주로 한 거마구가 중심이었다.
남부 지방에 한 사람이 탈 수 있는 기승용(騎乘用) 마구가 등장한 것은 고대 국가의 체제를 갖추게 되는 삼국 시대 초기인 4세기부터였다. 특히 부산 지역의 거칠산국(居柒山國)은 삼국 시대 초기 남부 지방에서 말을 타고 전투를 수행하는 기승용 마구를 가장 빨리 받아들인 곳 중의 하나였다. 마구의 주요한 변화는 재갈·등자(鐙子)·행엽(杏葉)에서 두드러지는데, 표비(鑣轡)[재갈의 일종으로 사람의 손으로 말을 완전하게 조종할 수 있는 도구]로 불리는 재갈을 필두로 늦어도 4세기 후반에는 등자·행엽 등의 각종 실용 마구가 등장하였다.
[삼국 시대 부산 지역의 기승 문화]
삼국 시대의 기승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마구의 특징과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는 다음과 같다.
1) 4세기경
우선 재갈[轡]의 경우 부산 복천동 고분군 38호·69호 등에서 보이듯이 앞 시기의 거마구용 재갈과는 달리 고삐이음쇠가 채용되고, 재갈을 굴레에 연결하는 끈이 2줄에서 1줄이 되도록 재갈멈치의 굴레 연결부가 변화하며 그 종류도 다양해졌다. 등자는 말안장 아래에서 발을 받치는 발걸이로서, 기수는 이를 통해 비로소 말 위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고 마음껏 활을 당길 수 있었다. 외형 및 구조적 차이에 따라 윤등(輪鐙)과 호등(壺鐙)으로 구분되는데, 윤등은 발을 딛는 부분이 하나의 둥근 테로 된 것으로 여기에 발을 끼워 넣어 발바닥의 중앙 위치쯤에 딛게 된다. 이에 비해 호등은 발 앞부분을 감싸는 주머니가 있어 발을 딛는 부분이 넓고 발을 끼우기가 쉬우나 그만큼 말을 타고 있을 때 발이 빠지기 쉬운 단점도 있다.
삼국 시대의 등자는 대부분 윤등인데, 현존 최고품(最古品)인 부산 복천동 고분군 48호의 등자는 목심(木心)에 피혁을 덮고 철판을 부분 보강한 목심철판피윤등(木心鐵板被輪鐙)이다. 이처럼 목심에 철판을 입힌 등자에서 점차 철제 등자로 바뀌어 갔다. 또한 말의 엉덩이 부근을 장식하는 행엽은 가장 이른 김해 대성동 고분군 3호분 행엽이 철판 1매의 심엽(心葉) 형을 띠고 있어서 초기의 형태와 제작상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형태는 이후 여러 제작법을 거쳐 삼국 전역에 널리 유행하게 된다. 그런데 등자와 행엽은 현 자료상 재갈에 비해 한 단계 늦게 출현하는 특징이 있다. 이 때문에 마구는 처음부터 한꺼번에 갖추어 등장하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등자나 행엽도 재갈처럼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에 그 원류가 있는 이상, 처음부터 재갈과 함께 입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4세기에 부산의 거칠산국 등 낙동강 하류역을 본거지로 한 금관가야 연맹에서 이미 토착화한 실용 마구와 기승용 무구가 다수 출토되고 있다는 것은 이때부터 기왕의 보병 전술(步兵戰術)이 기병 전술(騎兵戰術)로 전환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동시에 함께 출토되는 갑주(甲冑)를 통하여 중무장(重武裝)한 기마 전사단(騎馬戰士團)이 완비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마구만이 아니라 기마 전술도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5세기경
400년의 고구려 남정은 부산 지역의 기승 문화를 크게 변화시켰다. 기승 마구류의 수량도 더욱 증가하고 전 영남 지역으로 확산되었는데, 이는 고구려의 뛰어난 기동력에 자극받았기 때문이다. 한편 신라도 고구려와 금관가야 양자로부터 마필 문화를 적극 수용하며 성장해 가는데, 5세기 중엽 이후 부산 지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낙동강 하류역의 금관가야에서 이루어진 마구의 변화 중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ㅗ’자형 환판비(環板轡)의 개발이다. 이를 계기로 이후 남부 지방의 재갈은 고구려 등 북부 지방과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그 밖에 남부 지방 특유의 토착화는 계속 진행되었다. 한 가닥으로 된 꼬지 않은 고삐이음쇠의 개발이 대표적인 것으로서 백제·신라·가야 모두 5세기에 크게 유행하였다.
5세기 후반 대가 되면 금관가야 세력은 해체되고 새로이 성장한 대가야를 비롯한 여러 가야 세력과 신라를 맹주로 한 세력이 낙동강을 경계로 대치하는 국면으로 접어드는데, 마구도 신라·가야 양 지역에서 뚜렷한 지역차를 보여 주고 있다. 신라는 고구려 문물을 적극 수용함으로써 중국 둥베이~고구려~신라, 백제~가야~왜로 이어지는 기승 문화상의 2대 정보망 구축이 이때에 가장 뚜렷해졌다. 또한 신라는 이때부터 귀족적 문화의 틀을 갖추게 되는데, 수장급 고분을 중심으로 출토되는 각종 장식 마구가 이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 특히 편원어미형 행엽(扁圓魚尾形杏葉)과 같은 독자적인 행엽을 만들어 입주부형 식금구(立柱附形飾金具)와 함께 화려한 격자식(格子式)의 마장(馬裝)을 완성함으로써 강성해진 힘을 과시하였다. 이는 고구려로부터 받아들인 것으로 5세기 후엽에 확립되었다.
가야는 신라의 편원어미형 행엽을 모방하다가, 남제(南齊)에 사신을 보내는 등 자국의 힘이 가장 강해졌을 때 검릉형 행엽(劍菱形杏葉)을 만들어 독자적인 식마 문화(飾馬文化)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식마 문화보다는 실용적인 마구 생산에 주력함으로써 당시의 정세를 반영하고 있다. 5세기 후엽의 신라·가야는 마장제는 물론 재갈·등자·안장 등 제작에 있어서도 서로 다른 전통의 뚜렷한 지역차를 보여 주고 있다.
3) 6세기경
6세기로 접어들면, 신라는 반구형 혹은 패제 운주(貝製雲珠)를 사용하는 등 식마 문화의 변화가 뚜렷한데, 이는 율령 국가 체제로의 변환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는 그 동안 축적된 기술과 당시의 복잡한 정세 변화에 따른 지역 간의 빈번한 교류가 이루어져 남부 지방 전체에서 다양한 마구가 사용되며 기승 문화를 꽃피웠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도 가야 멸망 후 신라의 주도에 의해 박장(薄葬)을 주로 하는 새로운 장제(葬制)가 확산되면서 분묘에 마구가 매납되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