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29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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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允謙 |
영어음역 | Gim Yungyeom |
이칭/별칭 | 극양(克讓),진재(眞宰),산초(山樵),묵초(黙樵)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현주 1 |
[정의]
부산의 몰운대·영가대·태종대 등을 그린 『진재 화첩』을 남긴 진경산수화가.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극양(克讓), 호는 진재(眞宰)·산초(山樵)·묵초(黙樵). 아버지는 문인이자 화가인 노가재(老稼齋) 김창업(金昌業)[1658~1721]이다. 부인은 연안 이씨[1712~1777]로 동중추부사(同中樞府事) 이청(李淸)의 딸이다. 자식으로는 김지행(金摯行)[1733~1783]·김용행(金龍行)[1753~1778]과 외동딸을 두었다.
[활동 사항]
김윤겸(金允謙)[1711~1775]은 18세기에 활약한 조선 시대의 선비 화가로 안동 김씨 세보(世譜)에 의하면 김창업의 서얼로 태어났다. 김윤겸이 화가로서의 소양을 키우게 된 것은 학문과 예술을 좋아하던 집안의 분위기와 서화가로서 그리고 뛰어난 감식안을 가지고 있었던 아버지 김창업의 영향이 컸다.
김윤겸의 주요 행적으로는 생의 후년에 있었던 북유(北遊)와 소촌 찰방 역임을 들 수 있다. 중국 북방 여행은 박제가(朴齊家)[1750~1815]의 ‘봉별김장(奉別金丈) 진재북유시사수(眞宰北遊詩四首)’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이 시로 미루어 김윤겸의 북유 여정은 초가을 한 달 간이었으며, 공식적인 연행이었는지 여부는 밝혀져 있지 않다. 박제가가 김윤겸보다 39살 아래이고 박제가와 김용행[김윤겸의 아들]의 교유가 영조 말년인 점을 고려할 때 김윤겸의 북유는 1770년대 초반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또한 김윤겸은 1770년경 진주목에서 동쪽으로 9.6㎞[24리] 떨어진 역인 소촌(召村)의 찰방을 역임하였는데 이 시기에 영남 지방의 명승을 여행하면서 『진재 화첩』을 남겼다. 이 화첩에는 부산 동래 지역의 경승지인 몰운대·영가대·태종대 등의 풍광을 진경산수화풍으로 그려 부산 지역도 유람하였음이 확인되었다. 『진재 화첩』은 현재 부산광역시 서구 부민동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외에도 금강산과 한양 근교의 경승지를 유람하여 작품으로 남겼다.
김윤겸은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진경산수화풍을 계승한 진경산수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정선과 밀접한 접촉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정선이 김윤겸의 큰아버지인 김창집(金昌集)[1648~1722]의 천거로 도화서의 화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김윤겸은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를 계승하면서도 실경의 주요 부분을 대담하게 함축해서 표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겸재파의 조감도(鳥瞰圖) 형식의 정형화된 양식에서 탈피하였음을 알려 주고 있다. 또한 여러 경물들을 그리면서 대각선 구도나 변각 구도(邊角構圖)를 사용하여 화면을 독특하게 연출하거나, 스케치풍의 간략한 필치를 사용하고 대상의 부분적인 특징을 부각시키는 묘사에 엷은 수묵과 담묵 표현을 사용하는 등 진재 나름의 진경산수화풍을 창출하였다. 김윤겸은 1775년(영조 51) 9월 2일에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김윤겸의 작품을 기년명과 무기년명으로 나누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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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부인과 함께 경기도 양주의 고사산(高沙山)에 합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