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2717
한자 金尙洙
영어음역 Gim Sangsu
이칭/별칭 상수 영감님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주경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교가
성별
본관 경주
출생 시기/일시 1913년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45년 - 동인지 『죽순』 창간
활동 시기/일시 1953년 - 부산으로 이주
몰년 시기/일시 1998년연표보기 - 사망
출생지 대구광역시
거주|이주지 부산광역시 중구 보수동
학교|수학지 대구공립상업학교 -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
활동지 부산광역시

[정의]

6·25 전쟁 이후 부산 지역에서 예술인을 지원하는 활동을 전개한 인물.

[활동 사항]

김상수(金尙洙)[1913~1998]는 1913년에 대구에서 부잣집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과수원·비단 포목상·술도가 등으로 부를 축적하였다. 그러나 7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서모가 이복동생을 데리고 집에 들어왔다. 대구공립상업학교[현 대구상원고등학교] 시절에 넉넉한 집안 덕분에 어려운 친구들에게 학비와 생활비 등을 도와주는 것을 미덕으로 삼아 뒷날 이들에게서 경제적인 도움을 많이 받았다.

1945년 대구에서 시 동인지 『죽순(竹筍)』을 창간하면서 유치환(柳致環)·이윤수(李潤守)·박목월(朴木月)·이영도(李永道)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6·25 전쟁 직후인 1953년 여동생과 더불어 부산으로 와서 정착하였다. 경북여자고등학교와 일본체육전문학교를 졸업한 여동생은 부산여자고등학교에 근무하다가 현대 극장 앞 문내과 원장과 결혼하였다. 부산에서 자리 잡은 김상수는 당시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 미화당 백화점에서 대구 활동 시절의 시 동인지 제호를 딴 ‘죽순제(竹筍祭)’라는 예술인 친목 모임을 열었다. 이 파티에는 당시 부산 문화 예술계의 좌장인 시인 이주홍, 홍두표(洪斗杓), 화가 양달석(梁澾錫), 연출가 한형석, 평론가 양병식 등 부산 예술인이 총망라되었다. 당시만 해도 부산대학병원의 뒷산에는 연극인 강명순 소유의 대밭이 우거져서 이른 봄이면 죽순이 지천으로 났다. 이 죽순을 따다가 강명순이 요리를 하고, 대구집 주인 강정자가 술안주를 준비하였다.

죽순제를 계기로 김상수의 ‘문화 복덕방’ 역할이 본격화되었는데, 대구에서의 문인들과의 교류와 부산 예술인들과의 만남이 김상수를 그렇게 만들었고 본인도 좋아하였다. 그 시절 화가들이 전시회를 연다든가 음악회이든 사진전이든 안내장을 발송하려고 해도 관계되는 이들의 주소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어 어려움이 많았는데, 김상수는 이런 일에 발 벗고 나서서 팸플릿에 주소를 기록하고 우체국에 가서 발송하는 일까지 도맡아 했다. 당시 문화 예술인의 주소를 기록한 이는 김상수뿐이었다. 1980년대까지 부산에서 미술 전시회를 가진 작가 가운데 음으로 양으로 김상수의 신세를 지지 않은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에 김상수는 ‘상수 영감님’, 또는 '문화복덕방'이라 불리었다.

당시 김상수가 지닌 수첩 속에는 부산 지역 문화인 1천여 명의 주소와 연락처가 적혀 있을 정도였다. 이런 김상수가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자, 1980년 4월에 부산의 화가와 사진작가 45명이 그를 돕기 위한 전시회를 열기도 하였다. 1998년 김상수는 45년간의 부산 생활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