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2697 |
---|---|
한자 | 川島喜彙 |
영어음역 | Kawashima kii |
분야 | 문화·교육/언론·출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동 2가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전성현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일본인 언론계 유력자.
[가계]
가와시마 기이[川島喜彙]는 1880년 8월 일본 이바라키 현 자성군 천근촌 자하토사[日本 茨城縣 東茨城郡 川根村 字下土師]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천도사토[川島サト]이며, 아내는 천도사다[川島サダ]이다.
[활동 사항]
가와시마 기이는 1898년 4월 도쿄금성중학교[東京錦城中學校]를 졸업하고, 같은 해 호치신문사(報知新聞社)에 입사하면서 신문사에 발을 디딘 이후 줄곧 일본 신문사에서 활동하였다. 1902년 2월 고쿠민신문사[國民新聞社]로 옮겼으며, 다시 요코하마무역신문사[橫濱貿易新聞社]를 거쳐, 1905년 8월 요코하마매조신문사[橫濱每朝新聞社] 편집장이 되었다. 이후 퇴사하고 1907년 조선으로 건너와 조선의 일본인 신문계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 9월 인천에서 발행되던 일본어 신문인 『조선 신문(朝鮮新聞)』 편집장이 되었으며, 1909년 다시 경성으로 옮겨 『경성 신문(京城新聞)』 편집장이 되었다. 1911년 10월에는 전무이사, 영업국장을 역임하고 1912년에는 지배인이 되었다가 1915년 퇴사하였다. 퇴사 후 경성부 강기정 69번지에서 조선제약소(朝鮮製藥所)를 경영하며 청산가리와 황색 혈로염(血滷鹽) 제조에 종사했고, 『약업 신보(藥業新報)』라는 신문도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1919년 2월 부산의 양대 일본인 신문사 중 하나인 조선시보사 이사 및 편집국장으로 임명되어 부산에서 언론 활동에 종사하기 시작하였다. 1921년부터는 조선시보사 사장으로 취임하여 당시 부산의 대자본가들에 의해 설립 운영되던 『부산 일보』를 견제하며 중소 자본가 또는 기층 일본인들을 대변하는 논조로 신문을 운영하였다. 이 때문에 일본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자치 기구인 학교 조합, 부협의회[부회] 등에서 의원으로 당선되어 활약하였다. 1923년부터 부산학교조합 의원에 당선되는 한편, 부산부협의회 회원에도 당선되어 1934년까지 활동하였다.
특히 1920년대 부산의 가장 큰 정치적 이슈였던 전기 사업 부영화(府營化) 문제에서 그의 활약이 컸다. 당시 부산부협의회는 부영화에 대해 반대와 찬성으로 나뉘어 ‘전벌파’와 ‘비전벌파’ 또는, ‘협화회파’와 ‘기성회파’로 대결하였다. 그 속에서 가와시마 기이는 자신이 경영하는 언론사 『조선 시보』를 통해 부영화 반대를 지지하는 『부산 일보』를 비판하면서 전기 부영화가 필요하다는 여론을 조성하는 한편, 부산부협의회에서도 ‘비전벌파’의 입장에서 전기 부영화 운동을 이끌었다.
[저술 및 작품]
1935년 부산출판협회 소속으로 『신부산 대관(新釜山大觀)』을 편찬 간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