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24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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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洛駿-金洛俊 |
영어음역 | Gim Nakjun |
이칭/별칭 | 김 참서,전 참서 김낙준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동철 |
[정의]
개항기 부산 지역에서 일본어 통역관으로 활동한 관료.
[가계]
김낙준(金洛駿)은 동래부 소속 하급 통역관인 소통사(小通事) 집안의 후예이다. 1904년 편찬된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에 의하면, 당시 동래군 사중면 초량동에서 와가[기와집] 5칸 집에 살고 있었다.
[활동 사항]
개항 전에는 동래부 하급 통역관인 소통사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1881년(고종 18) 조사 시찰단(朝士視察團) 책임자의 한 사람인 박정양(朴定陽)[1841~1904]의 통사(通事)[통역관]로 일본에 다녀왔다. 소통사 집안 출신으로 익힌 일본어를 토대로 주차일본공사서 번역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 부산항 번역관, 동래감리서 주사, 외무아문 주사, 농상공부 참서관 등 외교·통상과 관련된 실무 부서 직책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동래우체사장, 부산우체사장 등 부산 지역 우체사[우체국의 전신]의 장(長)을 역임하였다. 1895년(고종 32) 5월 참서관으로 있을 때 국장 송규빈(宋憲斌)과 함께 명치환(明治丸)을 타고 인천에 도착한 후 일본인과 함께 연해안을 다니면서 연해에 등대(燈台)를 건설하는 일을 하였다.
1897년 4월 독립협회 보조금, 1907년 2월 동래부 읍내면에 위치한 사립정정의숙(貞靜義塾) 찬조금, 1907년 2월 재일본단지(在日本斷指) 유학생 학자금 등 각종 모금 사업에 기부하였다. 1906년경에는 부산항에 거주하는 박영길(朴泳吉), 최유붕(崔有鵬) 등과 함께 발기인으로서 초량소학교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동래부 사립학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1907년 12월에는 부산항 절영도에 있는 곽암(藿巖)[미역 바위]을 학교에 부속시켜 학교 경비에 보충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농상공부에 청원하기도 하였다.
특히 김낙준의 활동에서 주목되는 것은 1906년 9월에 계장(禊長) 박기종(朴琪淙) 등과 함께 ‘유원각 선생 매안감고비(柔遠閣先生埋案感古碑)’ 건립을 주도한 점이다. 이 비는 ‘유원각 선생’ 즉 동래부 소통사로서 대일 외교 업무에 종사한 그 선조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비에는 ‘감독 정3품 참서관 김낙준’이라는 그의 직책과 경력이 적혀 있다. 유원각 선생 매안감고비는 김낙준의 가계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