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24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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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東院津 |
영어의미역 | Dongwonjin Military Base |
이칭/별칭 | 월당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부산광역시 북구 금곡동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한정훈 |
[정의]
부산광역시 북구 금곡동에 있던 조선 시대 낙동강변의 수참.
[개설]
조선 초기에 낙동강의 동원(東院)에 수참(水站)이 설치되었다. 일본과의 통교(通交)에 낙동강의 수로(水路)는 중요한 기능을 하였다. 일본인이 내조(來朝)하여 서울로 갈 때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문경 새재를 넘어 충주에 이르고, 여기에서 다시 한강을 따라 한성(漢城)에 다다랐다. 또한 부산포(釜山浦)·제포(薺浦)·염포(鹽浦)의 삼포(三浦)에 도착한 일본 선박은 지정된 상경로(上京路)를 통해서만 서울 왕래가 허용되었다.
처음에는 낙동강 수로 왕래의 기점을 김해시 생림면 도요저(都要渚)의 도요 나루로 정하였으나, 왕래에 불편이 발생하여 세조 때 부산광역시 북구 금곡동의 동원으로 수참을 옮겨 왜인들의 왕래에 편익을 주었다. 따라서 동원진(東院津)은 그 뒤부터 왜인과 무역을 하는 요지(要地)가 되었다. 낙동강의 동쪽에 위치한 원(院)이기 때문에 동원이라 하였고, 그곳에 있던 나루 시설이므로 동원진이라고 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1404년(태종 4)부터 일본 국왕의 사신이 조선에 파견되면서 한·일 간의 공식적인 상호 교린 관계가 시작되었다. 양국 간에 사절을 파견할 때 서울을 오르내리는 행로가 정해져 있었다. 일본 사절이 부산포·제포·염포 가운데 한 곳에 이르면 도착한 포구에 따라 상경로가 달랐다. 부산포·제포에 도착한 일본 사절은 주로 낙동강 수로를 이용하여 서울로 올라갔고, 조선 통신사도 서울을 오르내릴 때 이 경로를 많이 이용하였다.
도착한 일본 사절은 이곳에 있는 왜관(倭館)에서 물품 교역을 한 뒤 상경하는 노정의 기착지 역참(驛站)에서도 교역을 행하였다. 따라서 일본 사절이 거쳐 간 수참 포구는 크게 번창하였다. 처음에는 일본 사절이 첫 기착지로 김해시 생림면 도요저의 도요 나루로 정하여 관선(官船)과 공천(公賤)을 갖추고 운행하였다. 그러나 김해시의 도요저가 부산포·제포와 거리가 너무 멀어 왜인이 가져온 교역 물품을 운반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1457년(세조 3) 부산광역시 북구 금곡동의 동원진으로 수참을 옮겨 김해와 양산의 공천을 참부(站夫)로 쓰면서 왜인들의 왕래에 편익을 주었다.
1485년(성종 16) 2월 기록에 따르면, 첫 기착지인 양산의 동원진에서 1차로 거두어들인 왜인들의 물품은 성주(星州)의 화원창(花園倉)에 수납되었고, 상납품(上納品)은 상주 함창~문경 조령관~충주를 거쳐 남한강 수로를 이용하여 서울에 도착하였다. 또한 1475년(성종 6) 5월 5일 일본 사절단에 지급하는 식량인 왜료(倭料)에 관한 논의를 통해 왜관을 거쳐 상경하는 사절에게 경상도 지역의 전세(田稅)로 일정한 식량을 충당해 주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동래(東萊)로 바치는 경주·밀양·대구 등의 전세는 양산의 동원진 수참에서 거두어 저장하도록 하였고, 만약 왜료가 모자랄 때는 가져다 쓰게 하였다. 이상의 내용과 같이 동원진은 원래 역원(驛院)이 있던 곳으로, 수참의 역무를 보게 하여 일본에서 수입되는 교역 물품을 수합하고 왜관에 지급되는 식량을 저장하는 창고이자, 일본 사절 상경로의 첫 기착지로서의 기능을 수행한 대일(對日) 교역의 근거지이었다.
[관련 기록]
『세조실록(世祖實錄)』 권6 세조 3년 1월 16일 기사에 “경상도 상주의 낙동강으로부터 초계의 사기소(沙器所)에 이르기까지 그 중간의 여울물이 모두 배가 운행할 만하니, 마땅히 수참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또 김해의 도요저는 비록 본디는 선척이 있었지마는, 그러나 제포와의 거리가 90리이고 부산포에 이르기가 70리이므로, 왜인이 가지고 온 물건을 운반하기 어려우니, 청컨대 양산 동원진의 동쪽 부근에 수참을 두고, 가까운 고을의 김해·양산의 공천으로서 참부로 정하고, 양산 군수로 하여금 관찰하도록 하소서[自慶尙道尙州洛東江至草溪沙器所 其間灘流皆可行船 宜置水站 且金海都要渚 雖本有船隻 然距薺浦九十里 至富山浦七十里 倭人帶來之物 輸轉爲難 請於梁山東院津東邊置水站 以傍近金海梁山公賤定爲站夫 令梁山郡守管察]”라는 기록이 나타난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2 양산군 산천조에 “동원진은 고을 남쪽 25리, 황산강 하류에 있다[東院津 在郡南二十五里 黃山江下流也]”라고 기록되어 있고, 『대동지지(大東地志)』 권10 김해 진도(津渡)조에 “동원진은 고을 동쪽으로 40리인데, 월당진이라고도 한다. 덕산역 아래에 있으며 양산군과 통한다[東院津 東四十里一云月唐津 在德山驛下 通梁山郡]”라고 기록되어 있다.
[변천]
『신증동국여지승람』 양산군조에 “동원은 고을 남쪽 22리이고, 동원진은 고을 남쪽 25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양산 동원 터로 비정되는 금곡동 동원 터[金谷洞東院址] 유적이 부산광역시 북구 금곡동 866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이 내용을 참고하면 동원진은 동원 터에 인접한 낙동강변에 위치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