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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2465
한자 李明哲
영어음역 Yi Myeongcheol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부산광역시 서구 아미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홍희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국악인
성별
대표경력 부산 아미 농악의 창시자
활동 시기/일시 1951년 - 부산 아미동에 정착
활동 시기/일시 1952년 - 아미 농악 시작
활동 시기/일시 1953년 - 아미농악단 창단
몰년 시기/일시 1973년연표보기 - 사망
출생지 함경북도
거주|이주지 부산광역시 서구 아미동 산19
활동지 아미농악단 - 부산광역시 서구 아미동
묘소 영락 공원 - 부산광역시 금정구 두구동 1494-1지도보기

[정의]

1950년대 이후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부산 「아미 농악」의 창시자.

[활동 사항]

이명철(李明哲)[?~1973]은 함경북도에서 태어나,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4후퇴 때 식솔들을 거느리고 부산의 피난민촌 부산광역시 서구 아미동에 정착하였다. 이명철은 이곳에 고물상을 열고, 아미동대신동을 중심으로 풍물을 잘하는 사람들을 모아 걸립패를 만들어 활동하다가 이후 전국을 돌며 활동하였다. 이명철의 3남 이용식(李容植)이 어린 나이에 이명철과 함께 풍물을 하게 되자 그의 풍물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1952년 이명철부산광역시 서구 아미동 산19번지 자신의 집에 ‘아미 농악’이라는 입간판을 달았다. 이때 처음으로 「아미 농악」을 정식으로 만들게 되었다.

이명철은 1953년 정초에 자신을 단장으로 하는 아미농악단을 만들어 「아미 농악」을 재출범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아침저녁 한솥밥을 먹으며 동고동락하는 예능 집단을 구성하여 전국을 순회할 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끼니를 해결하는 일이었다. 그만큼 가난과 배고픔을 겪는 것이 문제였다. 이에 아미농악단은 정초에는 지신밟기를 하여 모은 돈으로 단원들의 생계를 도우며 활동하다가 이후 헐벗고 가난한 동네를 떠나 전국을 돌아다녔다. 한번 걸립을 떠나면 벼가 필 때까지 6개월은 족히 지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동네 인근의 빼어난 기능을 가진 이를 초빙하여 몇 달이고 합숙 훈련을 하여 농악경연 대회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그 무렵 어깨너머로 숨어 배운 3남 이용식의 비범한 재주를 단원들이 인정하면서, 이용식은 또래의 정우수와 어울리며 걸립패의 일원이 되었다. 이용식이 14세 되던 해에 겨우 11명의 적은 인원으로 신라 문화제 제1회 농악 경연 대회에 출전하여 최우수상을 받기도 하였다. 현재 「아미 농악」 혹은 「부산 농악」이라고 부르는 「아미 농악」의 1세대는 이명철·정삼렬·김차술·최상택·유삼용(柳三龍)·조승현·천해수·조귀봉·정윤화·김동순 등이다. 이명철은 1973년 아미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

묘소는 부산광역시 금정구 두구동 영락 공원에 마련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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