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23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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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梵魚寺碑林 |
영어의미역 | Forest of Monuments at Beomeosa Temple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청룡동 546] |
시대 | 조선/조선,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조원영 |
[정의]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에 있는 조선 시대부터 현대까지 범어사에 세운 비석군.
[개설]
비림(碑林)이란 명문을 새긴 비석이 마치 나무숲처럼 무성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범어사 비림(梵魚寺碑林)은 10여 기가 넘는 비석과 함께 부산 범어사 등나무 군락, 소나무 숲이 있다 하여 비림이라 불리는데, 중국 산시성 시안의 비림과 비교된다.
[위치]
범어사 비림은 범어사 어산교(魚山橋) 앞에 위치한다. 범어사와 관련된 승려의 비석 및 중수기, 공덕비, 사리탑 이건 공덕비 등 다양한 성격의 비석이 특별한 배치 계획 없이 세워져 있다. 소재지 주소는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546번지이다.
[형태]
비석 형식은 다양하다. 간단하게 받침돌을 놓고 그 위에 비신(碑身)을 세운 형태가 있고, 받침돌을 거북 형상으로 조각한 귀부(龜趺) 위에 비신을 놓고 다시 그 위에 이수(螭首)를 올려서 통일 신라 시대 이래의 비석 양식을 따른 것, 그리고 자연석에 그대로 음각한 것 등이 있다.
[금석문]
각 비석은 온전하게 남아 있어 비신에 새겨진 명문을 판독할 수 있다.
[현황]
범어사 비림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어산교를 건너야 한다. 그런데 어산교를 건너기 전 범어사 옛길 500m쯤 거리에 다섯 개의 비석을 만날 수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앙에 있는 것이 동래 부사와 조선 통신사를 역임한 조엄(趙曮)의 비석이다. 조엄은 조선 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구황 식물인 고구마를 가져온 인물로도 유명하다. 범어사에는 전생에 범어사에 주석하였던 낭백이라는 승려가 숭유 억불 정책으로 고생하는 스님들의 잡역을 없애 주려고 다음 생에 조엄이라는 관리로 태어나 범어사의 잡역을 없애 주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비석에는 ‘순상국 조공엄 혁거사폐 영세불망단(巡相國趙公嚴革祛寺幣永世不忘壇)’이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어산교를 지나 일주문으로 걸어가면 오른쪽에 부도와 비석이 보인다. 부도는 총 30기가 있는데 맨 앞에 11기, 중간에 10기, 세 번째 줄에 9기가 있다. 645명의 승려 이름 중에는 의상, 원효, 태고, 묘전, 서산, 사명이 포함되어 있다. 선찰 대본산 범어사 중수기, 공덕비, 사리탑 이건 공덕비와 최근에 열반한 승려와 관련된 10기의 비석이 서 있다. 인근에는 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된 범어사 당간 지주도 서 있다.
이 가운데 범어사 사적비는 의상 대사에 의해 창건된 범어사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다. 1923년에 건립되었으며 화강암으로 만든 2단의 대 위에 대리석으로 비를 세웠다. 이수는 화강암이며 용무늬를 새겨 놓았다. 또 일주문으로 올라가는 방향에서 오른쪽에는 용성 선사의 비석이 세워져 있고, 왼쪽에는 범어사를 선찰로 혁신한 성월 선사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한편 ‘성월당 일전(惺月堂一全)’이라는 명문이 있는 자연석이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성월당 일전 스님을 일컬어 ‘혁신 범어사 선찰 개창주’라고 표기한 자연석도 있다. 성월 선사는 대한제국 말 범어사의 주지를 지내면서 선원을 세우는 등 범어사를 중흥시킨 승려이다.
바위 곳곳에는 갑계(甲契)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범어사의 경우 1811년(순조 11)부터 1930년 사이에 사찰 재산을 늘려 나갔는데, 당시 사원에서 조직한 계 가운데 갑계가 사원 경제에 가장 많은 기여를 하였다. 범어사 역시 갑계 활동이 활발하였는데, 이를 통해 전답과 조전(租田) 등을 헌납하였다. 이처럼 범어사 사원 경제를 일으킨 갑계 조직의 명단이 바위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의의와 평가]
범어사 비림에는 시기가 다른 다양한 비석이 세워져 있으며, 그 비석들의 명문을 통하여 근대 범어사의 역사를 알 수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