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9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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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梵魚寺事蹟碑 |
영어의미역 | Monumental Stone at Beomeosa Temple |
이칭/별칭 | 범어사사적비명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청룡동 546]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미숙 |
[정의]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에 있는 일제 강점기 범어사에 세운 비.
[건립 경위]
1923년 당시 범어사 주지인 승려 담해(湛海)가 범어사의 연혁과 선찰 본산(禪刹本山)으로서의 사격(寺格)을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세웠다.
[위치]
범어사 사적비(梵魚寺事蹟碑)는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546번지 범어사 경내에 있다.
[형태]
전체 높이는 356㎝이고, 비신은 높이 204.2㎝, 너비 85㎝, 두께 43㎝이다.
[금석문]
비의 제목은 「범어사 사적 비명(梵魚寺事蹟碑銘)」이며, 비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금정산의 정상에 우물이 있는데 옛날 그곳에 이상한 물고기가 놀았다. 그 물고기는 범천(梵天)에서 내려온 것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우물에는 금빛이 났다. 대개 산의 이름을 금정산이라 하고, 절을 범어사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불기 1682년 을묘년 신라 무열왕 2년[655]에 대마도의 왜적들이 국경을 침범하여 왕이 크게 근심하고 있던 터에 의상 대사가 태백산으로부터 이 산으로 와서 머물다가 법력으로 적을 물리쳤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평장사(平章事) 유춘우(柳春雨) 등을 보내어 이 절을 창건하도록 하였다.
먼저 미륵상을 주조하고 2층의 미륵전을 건설하여 중요한 요지를 진압하였고, 미륵전 서쪽에 비로전을 세우고 비로자나존상을 안치하였다. 그 동쪽으로 대장각을 설치하여 팔만 장경을 보관하도록 하였고, 나머지 각 불상과 석탑·법전·고각·종루·석등·신단(神壇)과 40개의 법체(法體)와 사천왕각과 33층의 쇠 당간과 360여 칸의 요방(寮房)과 360결의 밭과 100호의 노비 그리고 무량한 사물들이 장대하게 마련되었다. 상세한 것은 창사기(創寺記)에 실려 있다. 당시를 상상해 보면 참으로 동쪽의 거대한 사찰임을 알겠다.
이는 대개 왕이 부처를 향하는 정성이 대사로 인하여 깊어진 것이요, 대사의 연화(演化)의 기미가 왕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것이다. 이때부터 이 절이 사람들과 세상에 복리(福利)를 베푼 것이 성대하였다. 그러나 도를 깨친 선사가 이어지지 못하고 세상의 인정도 많이 변하여, 고려에서 조선으로 내려오면서 흥폐(興廢)하는 일이 없지 않았고, 고찰할 만한 문헌도 없어졌다.
불기 2619년 임진년 조선 선조 25년[1592]에 전쟁으로 절이 불타 없어졌다. 전쟁이 끝난 뒤 대중이 자그마한 규모로 건물을 얽었으나 단지 빈터만을 지킬 뿐이었다. 10년이 지난 임인년[1602]에 주지승 묘전(妙全)과 현감(玄鑑)·계환(戒環)이 대웅전을 창건하였는데, 갑자기 하루는 마당가에서 부처의 얼굴이 약간 드러나 곧장 재와 흙을 파헤치고 모셔 내니 바로 전날 만든 미륵상이었다. 사나운 불 속에서도 손상된 곳이 없었다. 지금 미륵전 동쪽을 등지고 앉아 있는 것이 그것이다.
임인년으로부터 56년 뒤 무술년 효종 9년[1658]에 대웅전을 중건하고 인견(印堅)과 순식(順湜)·총열(摠悅)·해관(海寬)·계환(戒環)이 주머니를 털어 자금을 출자하고, 재묵(再黙)과 각민(覺敏)이 고루 모연(募緣)하여 재물을 모았으나, 비용이 부족하여 판청(判廳)으로부터 돈을 내었는데 최선(最善)과 대홍(大弘), 최대(最大)가 힘을 썼다.
무술년으로부터 41년 뒤 기묘년 숙종 25년[1699]에 자수(自脩)·석경(釋瓊)·문인(文印)·명학(明學)이 보제루(普濟樓)를 창건하였는데, 관찰사 이공과 절도사 이공이 함께 시주한 것이다. 그 외 다른 성전(聖殿)과 향각(香閣), 그리고 청풍(淸豊)·심검(尋劒)·원응(圓應)·안심(安心)·함홍(含弘)·해행(解行)·침계(枕溪)·금당(金堂) 등 8방을 중수할 때 공덕이 있는 사람과 그 연대는 각기 기문이 있어 다시 거론하지는 않는다. 다만 해행방(解行房)만은 최선(最善)이 재산을 다스렸다.
한 해 걸러 전답과 자금과 쌀을 내어 사찰과 암자를 보수하여 빈번히 이 절을 지키는 자는 곧 갑계(甲契)이다. 이 계가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이 공심(公心)을 위하는 정성과 수고를 함께 나누는 의리는 참으로 불교를 배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선에서 배척할 때 깊은 산속에 은거하여 한 해를 견디기도 어려웠는데, 이 갑계의 힘이 아니었다면 보존할 도리가 있었겠는가.
불기 2932년 을사년 고종 광무 9년[1905]에 팔상전을 다시 세우고 여러 성상(聖像)에 그림을 그렸는데, 혼해(混海)와 학암(鶴庵) 두 선사가 같이 이 일을 맡았다. 현재 아홉 곳의 암자가 있는데, 극락암(極樂庵)·대성암(大聖庵1234)·금강암(金剛庵)·사자암(獅子庵) 네 암자는 그 창건 시기를 알 수 없지만, 그중 극락암은 해성(海城) 선사가 힘을 다해 보수하였고, 대성암은 울암(蔚庵) 선사가 큰 공력을 들였으며, 금강암은 영명(永明) 선사가 길이 견고하게 하였다.
불기 2711년 갑자년 숙종 10년[1684]에 신주(信珠) 선사가 청련암(靑蓮庵)을 창건하였고, 29년이 지난 계사년[1713]에 수좌(首座) 선식(禪識)과 시주자 김치명(金致鳴)이 안양암(安養庵)을 세웠으며, 그 뒤 30년 계해년 영조 19년[1743]에는 신주(信珠)와 섭총(攝摠) 등이 내원암(內院庵)을 창건하였다. 원효암(元曉庵)과 계명암(鷄鳴庵)은 본사와 함께 지어졌는데, 원효암은 중간에 이건하였지만 어느 해 누가 한 일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옮겨 세우고 수선하는 공로로는 금해(錦海)와 응허(應虛) 두 선사가 으뜸이다. 계명방(鷄鳴房)이 이미 불탔는데, 유독 두 마리의 서계가 동쪽 가장자리에 엎어져 있었다. 불기 2920년 계사년 고종 30년[1893]에 우화(雨華)와 금봉(金峯) 두 장로와 혼해 강백(講伯)이 옛 자국을 파내고 새 칠을 더하여 ‘계명암(鷄鳴庵)’이라고 편액하였다.
일을 맡은 소임이 바뀌었던 것을 살펴보면, 지금으로부터 321년 전엔 주지(住持)가 담당하였고, 180년 전에는 승통(僧統)이 담당하였으며, 32년 전에는 총섭(總攝)이 맡았는데 예봉(禮峯) 선사가 먼저 임명되었다. 16년 전에는 섭리(攝理)가 맡았는데, 경산(擎山) 선사가 그 임무를 맡았다. 13년 전에는 다시 주지에게 돌아왔는데, 주지 성월(惺月) 선사·등암(藤巖)·담해·회현(晦玄)·학암(鶴庵)·경산 등 여러 선사들이 사찰 일에 부지런하여 선법(禪法)을 존숭하자 스님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금정산 일대가 선찰 본산이 되어 도를 연마하고 불법을 강설하는 것이 하루도 그치지 않았다.
일찍이 이 산에는 영원 조사(靈源祖師)와 낭백 대사(朗伯大師)와 같은 여러 위대한 인물들의 불도(佛道)와 세상을 위한 높은 지혜와 맑은 행실이 대부분 구전으로 전해질 뿐 문헌은 사라졌으니, 이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지금 주지 담해 선사가 대중의 뜻과 같이 사적을 알리는 비석을 세우고자 나에게 글을 구하여 새기고자 한다.
‘높으신 법력으로 오랑캐를 몰아내니 임금께서 몸소 시주하셨네. 보배로운 불전과 구름 같은 누대가 우뚝하니 그 모습 갖추었다네. 큰 법고를 울리고 큰 법등을 밝혀라. 중생들의 인연은 얕고 법사는 이어가기 어려워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거의 흥망성쇠를 겪었네. 임진년 전쟁의 재앙으로 사찰의 운명이 크게 막혔네. 이로부터 십 년 뒤 창건하는 자가 비로소 생겨 사찰을 일으키고 암자를 세우니 시대를 따라 그 뒤를 이었네.
불법 도량은 맑고 깨끗해 세간에 두루 알려졌네. 스님들 구름처럼 모여드니 선종 대찰이요, 불법 본산이라. 명안(明眼)을 지닌 대덕(大德)들 뒤를 좇아 서로 연 이으니 강당을 열어 두루 펴는 설법이 천년만년 퍼지리라.’ 불기 2950년 계해년 8월 우두산인(牛頭山人) 남천 한규 짓고 쓰다
[梵魚寺事蹟碑銘 慶尙南道東萊郡金井山梵魚寺事蹟碑銘幷序 山頂有井 昔游異魚 其來梵天云 而井光金色 盖山名金井·寺號梵魚者 其以此也 敎主千六百八十二年乙卯 新羅武烈王二年 島夷犯國境 王大憂 義湘大師 自太白來 住玆山 卽以法力却之 王大喜 遣平章事柳春雨等 刱玆寺 而先造彌勒像 建二層殿 以鎭重要之地 殿之西 立毘盧殿 安毘盧尊像 其東置大藏閣 藏八萬大經 其餘各佛像·石塔·法殿·鼓閣·鍾樓·石燈·神壇·四十法體·四天王閣·三十三層鐵幢·三百六十寮房·三百六十結畓·百戶奴婢 且無量什物之設施張大 詳載於創寺記也 想象當時 固爲東巨刹也 盖王之向佛之誠 因師而深也 師之演化之機 由王而發也 自此而玆寺之福利於人世者 盛矣 道師不繼 世情多變 所以高麗漢陽以來 其不無興廢之事 而無文可考者 二千六百十九年 壬辰李朝宣祖二十五年 兵火燒盡也 經劫餘 衆小規結搆 只守空墟 過十年壬寅 住持妙全與玄鑑戒環 創大雄殿 忽一日 佛面小露於庭畔 卽開灰土侍出 乃昔造彌勒像也 其猛火裏無傷 今彌勒殿背東而坐 是也 壬寅後五十六年戊戌 孝宗九年 重建大雄殿 印堅·順湜·摠悅·海寬·戒環 傾橐而出資 再黙·覺敏 以均募緣而鳩財 用之不足 故自判廳出錢 而最善·大弘·最大 另力也 戊戌後四十一年己卯 肅宗二十五年 自脩·釋瓊·文印·明學 刱普濟樓 巡相李公·節度使李公 幷爲檀越也 其他聖殿香閣等 且淸豊·尋劒·圓應·安心·含弘·解行·枕溪·金堂八房 其重脩有功之人與其年代 各有其記 姑不更擧 獨解行一房 最善治産 間年出畓與金米 補寺補庵 多大特保此寺者 卽甲稧也 盖斯稧也 不知始於何時 而其爲公之誠·同勞之義 眞學佛之心也 其李朝斥佛之時 隱於深山 措年是難 若非斯稧之力 安有保存之道哉 二千九百三十二年乙巳 高宗光武九年 重建八相殿 繪畵諸聖像 混海·鶴庵二師
同幹其事也 現有九庵 極樂·大聖·金剛·獅子四庵 其創時不知 而極樂 海城師極力補守 大聖 蔚庵師大有功 金剛 永明師永堅固也 二千七百十一年甲子 肅宗十年 信珠師 刱靑蓮 過二十九年癸巳 首座禪識施者金致鳴 創安養 此後三十年癸亥 英宗十九年 信珠又與攝摠等 刱內院也 元曉·鷄鳴 與寺同時 而元曉之中間移建 無徵其何年何人之事 然改建脩繕之功 錦海·應虛二師 最也 鷄鳴房 已火 獨有二首石鷄伏東邊 二千九百二十年癸巳 高宗三十年 雨華·金峯兩長老 混海講伯 浚舊而加新 額鷄鳴庵也 按任事改革 踞今三百二十一年前 以住持 百八十年前 爲僧統 三十二年前 爲總攝 而禮峯師先被任也 十六年前 攝理 而擎山師任其任也 十三年前 還爲住持 住持惺月禪師 藤巖·湛海·晦玄·鶴庵·擎山諸師 勤於寺事 而尊崇禪法 衲子雲集 金井一局 遂爲禪刹本山 鍊道說法 無日不然也 曾於玆山 如靈源祖師·朗伯大師等諸偉人之爲道爲世之高慧淨行 多有口傳而文傳見失 是甚遺感也 時住持湛海禪伯 同大衆之意 現寺蹟立石 而求余文以爲銘 銘曰
法力驅夷 君王檀越 寶殿雲臺 備體兀兀 擊大法鼓 燃大法燈 衆生緣淺 道師難承 麗代李朝 幾見興替 龍蛇之災 寺運大滯 自此十年 創者稍有 起寺建庵 隨時承後 道場淸淨 普聞世間 衲子雲集 禪刹本山 明眼大德 踵武相連 開堂普說 於千萬年 敎主二千九百五十年癸亥八月日 牛頭山人 南泉 翰奎 撰而書].”
[현황]
범어사가 소유하여 관리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