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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2310
한자 朴文熺-朴文熹
영어음역 Bak Munhui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장선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경력 신간회 중앙 집행 위원
출생 시기/일시 1901년 10월 21일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19년 - 사립동명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22년 - 경성성서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27년 - 니혼대학 경제학부 입학
활동 시기/일시 1925년 11월 - 동래청년연맹 창립 위원 및 집행 위원으로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25년 12월 - 경남청년연맹 조직부 집행 위원으로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26년 1월 - 혁파회 조직
1926년 9월 - 정우회 집행 위원으로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28년 - 신간회 동래지회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29년 6월 - 신간회 중앙 집행 위원으로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29년 12월 - 광주 학생 운동 지원
활동 시기/일시 1930년 12월 23일 - 신간회 탈퇴
활동 시기/일시 1932년 8월 - 상하이에서 김두봉·김원봉· 박차정과 만남
활동 시기/일시 1932년 9월 - 귀국 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입교생 선발
활동 시기/일시 1932년 10월 - 중국 남경으로 감
활동 시기/일시 1933년 - 귀국
활동 시기/일시 1934년 1월 -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입교생 사건으로 체포됨
활동 시기/일시 1934년 6월 19일 - 치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 받음
활동 시기/일시 1936년 6월 19일 - 출소
활동 시기/일시 1936년 - 동아일보사 동래지국 운영
활동 시기/일시 1945년 9월 - 한국민주당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46년 - 한국민주당 탈당
활동 시기/일시 1946년 12월 - 민중동맹 결성에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47년 - 조선공화당 중앙 상무위원으로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48년 1월 - 대중일보사 경영
몰년 시기/일시 1950년 6월 - 실종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34년 1월연표보기 -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입교생 사건
출생지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405
거주|이주지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 196
학교|수학지 사립동명학교 -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 240지도보기
학교|수학지 경성성서학교 - 서울광역시
학교|수학지 니혼대학 - 일본 도쿄
활동지 동래청년연맹 - 부산광역시 동래구지도보기
활동지 경남청년연맹 - 부산광역시 동래구
활동지 혁파회 - 부산광역시
활동지 신간회 동래지회 - 부산광역시 동래구
활동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 중국 남경
활동지 동아일보사 동래지국 - 부산광역시 동래구
활동지 대중일보사 - 부산광역시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밀양. 아버지는 박용한(朴容翰)이고, 어머니는 김맹련(金孟蓮)이다. 아버지는 대한제국 탁지부 기사였다. 어머니 김맹련의 사촌 동생이자 기장 출신의 항일 운동가인 김두봉(金枓奉)은 외5촌 당숙이다. 동생은 박수정·박문하·박문호·박차정(朴次貞)이다. 박문호·박차정과 더불어 항일 독립운동을 하였다. 밀양 출신으로 의열단을 이끈 김원봉(金元鳳)은 동생 박차정의 남편이다. 1924년 6월 3일 대구신명여학교 출신 이도금(李道今)과 결혼하여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박문희(朴文熺)[1901~?]는 1901년 10월 21일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405번지에서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9년 2월 사립동명학교[현 동래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성서학원으로 진학하였다. 1922년 경성성서학원을 졸업하고 안성·통영·서울 등지에서 성결 교회 전도사로 근무하였다. 1925년 고향인 동래로 와서 11월 동래청년연맹 창립에 주도적 역할을 하여 창립 준비 위원 및 집행 위원에 선출되었다. 1925년 2월 경남청년연맹 창립 대회에 참가하여 조직부 집행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6년 1월 동래 혁파회(革波會)를 조직하고 서무부 위원으로 선출되어 현대 경제 조직과 사회 과학을 학술적으로 연구하며 이 단체를 이끌었고, 9월에는 정우회 집행 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1927년 장인 이상윤(李相潤)의 권유로 일본으로 가서 니혼대학[日本大學] 경제학부에 진학하였다. 1928년 12월 귀국하여 신간회에 가입하고 동래지회에서 활동하였다. 1929년 6월 신간회 복대표 대회 부산 지역 복대표로 참가하여 중앙 집행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중앙 상무 집행 위원으로 전국 순회강연을 다녔다. 11월에 광주 학생 운동이 발생하자 신간회 중앙본부 간부로서 이를 지원하고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투쟁을 전개하다가 12월에 종로경찰서에 수감되었다. 이어 단식 투쟁을 하였으며 신간회 회장 김병로의 교섭으로 석방되었다. 박문희신간회 운동이 이념 투쟁보다는 일반 민중을 위한 현실적인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로 인해 신간회의 우경화 경향을 비판하던 강경파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이에 박문희는 1930년 12월 23일 신간회를 탈퇴하였다.

1932년 8월 중국 상하이[上海]로 가서 김두봉을 만났고 남경으로 가서 의열단장 김원봉박차정을 만났다. 당시 그들은 국민당 정부에서 자금을 지원받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준비 중이었다. 김원봉이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지원자 선발을 부탁하자 박문희는 9월 부산으로 돌아와 1기 입교생 다섯 명을 선발하였다. 선발된 사람들은 이무용, 김영배, 문길환, 최창학, 신병원이었다. 박문희는 배표와 여비를 제공하여 입교생들을 상하이로 보냈고, 자신도 10월 말경 남경으로 가서 조선혁명간부학교에 합류하였다.

박문희는 1933년 입교생 추가 모집을 위해 귀국하였다. 하지만 이때 입교한 1기생 다섯 명이 국내에서 체포되면서 박문희가 배후로 지목되어 1934년 1월 체포되었다. 1934년 3월 24일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6월 12일 3년형을 구형 받고 6월 19일 징역 2년형을 선고 받았다. 부산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하다가 1936년 6월 19일 출소하였다. 출소 후 동아일보사 동래지국을 경영하였다.

해방 후 한국민주당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가 1946년 탈당하여 12월 민중동맹 결성에 참여하였다. 1947년 조선공화당 창당에 참여하여 중앙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48년 1월 부산에서 일간지 『대중 신문』을 인수하여 『대중 일보』로 개명하고 사장에 취임하였다. 1949년 『대중 일보』를 『부산 일보』에 합병하고 사임하였다. 1950년 6월 말 6·25 전쟁 중 행방불명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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