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23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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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吳緯泳 |
영어음역 | O Wiyeong |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종세 |
[정의]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정치인.
[가계]
본관은 해주(海州). 아내 박점출과의 사이에 2남 4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오위영(吳緯泳)은 1902년 5월 5일 경상남도 울산에서 태어났으며, 일본에 있는 고베고등상업학교[神戶高等商業學校][현 고베대학]를 졸업하였다. 1929년 이후 초계와 진해 등지에서 금융 조합 이사를 역임하였는데, 금융계에서 활동한 경력이 인정되어 1947년 조선신탁은행[한국신탁은행의 전신, 하나은행에 합병] 은행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오위영은 교통부 자문 위원, 중앙경제위원, 중앙경제위원회 물가분과위원, 재정금융위원, 상공위원, 공업분과위원 등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한국 경제의 재정 관계 중심부에서 활동하였다.
이 기간에 다진 탄탄한 재정을 기반으로 오위영은 부산 일원의 자산가로 부상하였다. 하지만 이 때문에 국민당 소속의 제헌 국회 의원인 이진수(李鎭洙)로부터 부정한 방법으로 자금을 대부(貸付)받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1950년 5월 30일에 치러진 선거에서 울산 갑구에 출마하여 제2대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오위영은 초선이면서도 정계의 주목을 받아, 무소속이면서도 국회 전원위원장, 재정경제위원장, 예산결산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1년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이 새로운 총리를 물색할 때 오위영이 장면(張勉)을 추천하여 총리로 기용되게 하였다. 오위영은 장면, 현석호(玄錫虎) 등 소장파 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1951년 12월 23일에 설립한 원내자유당에 소속되었으나, 1954년 이승만의 사사오입 개헌을 반대하며 결성된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였다가, 1955년 민주당 창당에 가담하였다. 이후 오위영은 민주당 신파의 정치가로 자리를 굳혔다.
1956년 오위영은 민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 민주당 중앙상무위원회 부의장으로 활동하였다. 1958년 제4대 총선에서 부산 동구 을구 선거구에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압도적인 득표로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그 후 그 해 6월 5일부터 11월 7일 유진산(柳珍山)에게 바통을 넘겨주기까지 민주당 원내총무를 지내면서 거대 야당의 중진으로 지명도를 쌓았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고 내각 책임제와 국회 양원제가 실시되자 그는 총선에 나서 경상남도 참의원에 당선되었다. 7·29 총선 결과 장면 정권이 들어서자 오위영은 집권당인 민주당의 실력자로 등장하여, 국무원 사무처장으로 정부와 정계의 다리 구실을 맡는 한편 1961년에는 무임소장관이 되었다. 하지만 5·16 군사 쿠데타로 민주당 정권이 붕괴하면서 정계에서 은퇴하여 야인 생활로 접어들었다. 1963년 장면, 김도연, 현석호, 조재천(曺在千), 박순천(朴順天) 등과 함께 민주당 재건에 참여하고, 이후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1978년 10월 2일 사망하였다.
[묘소]
묘소는 경상남도 창녕군 장마면 유리 논골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