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4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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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順天 |
영어음역 | Bak Suncheon |
이칭/별칭 | 박명연(朴命連)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대변리 88-2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박선애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정치인.
[가계]
아버지는 박재형(朴在衡)이고, 어머니 김춘열(金春烈)이다.
[활동 사항]
박순천(朴順天)[1898~1983]은 1898년 9월 10일[음력]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대변리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한학자였지만 어머니는 기독교 신자였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와 다른 가족들과 함께 대변리에서 3㎞쯤 떨어져 있는 월전교회에 다니면서 기독교 신자의 소양을 키웠다.
1917년 부산진일신여학교를 졸업하고, 마산에 있는 의신여자중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의신여자중학교에 재직 중이던 1919년 3·1 운동 때 민족 대표의 한 사람인 이갑성(李甲成)이 보낸 독립운동가와 연결되어 마산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붙잡혔다. 교인들의 신원 보증으로 1주일 만에 보석으로 풀려나 경상남도 서부 지역으로 도피하였다. 도피를 도와준 집 주인이 이웃에게, 순천에 시집갔다가 소박맞고 친정에 돌아왔다고 한 거짓말 때문에 순천댁(順天宅)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집권한 민주당 정권 때 비로소 40년을 사용한 순천이라는 이름을 호적에 정식으로 올려 박순천으로 개명하였다. 본명은 박명연(朴命連)이다.
1920년 기생(妓生)으로 가장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요시오카여자의학전문학교[吉岡女子醫學專門學校]에 들어갔으나, 재학 중 3·1 운동 때의 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배된 것이 드러나 마산으로 압송되었다. 이후 1년 6개월간 마산감옥소에서 복역하였다. 출감 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여자대학[日本女子大學] 사회학부를 졸업하고, 28세에 경상북도 고령군 출신으로 일본에 유학 중인 변희용(卞熙瑢)과 결혼하였다. 혼인 후 고령에서 농촌 계몽 운동을 하다가, 1936년 서울에 올라가 조선공예주식회사 금강전구공장 여공감(女工監)으로 일하였다.
1937년 황신덕(黃信德)과 함께 경성가정여숙(京城家庭女塾)[현 중앙여자고등학교]를 세워 부교장으로 일하였다. 경성가정여숙에서 재직하던 1943년 3월경 자신이 가르치는 경성가정여숙 학생들을 정신대에 보냈는데, 최근 이러한 친일 행적이 밝혀지면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1945년 8·15 광복 후 건국부녀동맹을 조직하고, 모스크바 삼상 회의의 결정에 불복하는 신탁 통치 반대 운동에 앞장섰다. 1947년부터는 독립촉성애국부인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학교법인 추계학원(學校法人秋溪學院) 이사를 역임하였다. 1948년 정부 수립 후 감찰 위원이 되었고, 1949년 국민회 중앙본부 부위원장과 대한여자청년단 단장을 지냈으며, 6년 동안 대한부인회 총본부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50년에는 대한부인회 소속으로 국회 의원에 출마하여 제2대 국회 의원이 되었다. 자유당 정권과 투쟁하면서 1955년 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1956년 민주당 최고 위원으로 선출된 이래 네 차례나 연임하였다. 한편 4·5·6대 국회 의원으로 거듭 당선되어 여권 신장과 민권 수호에 앞장섰다. 제3공화국 때는 민주당 총재를 지냈고, 1965년에는 통합 야당인 민중당의 당수가 되었으나 한일 회담 비준 반대를 위한 의원직 총사퇴의 극한투쟁 결정에서 강경파인 윤보선(尹潽善)이 탈당하자, 제5대 대통령 선거에 대비하여 유진오(兪鎭午)에게 당수직을 물려주었다. 1967년 통합 야당이 된 신민당(新民黨)의 전국구로 국회에 진출하여 5선 의원이 되었다.
고령으로 정계를 은퇴한 뒤 경기도 안양시에 있는 근명학교(槿明學校)의 이사장[1972년], 중앙여자고등학교 이사[1972년], 육영수여사추모기념사업회 이사장[1976], 국정 자문 위원[1980], 독립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1982] 등을 지냈으며 1983년 85세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