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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2104
한자 鄭運公殉義碑
영어의미역 Stone Monument for Jeong Un
이칭/별칭 충신 정공운 순의비,정운 순의비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산145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강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798년연표보기 - 정운공순의비 건립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543년연표보기 - 정운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592년연표보기 - 정운 사망
문화재 지정 일시 1972년 6월 26일연표보기 - 정운공순의비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20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정운공순의비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재지정
현 소재지 몰운대 -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산145지도보기
원소재지 몰운대 -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산145지도보기
성격 비|순의비
관련인물 정운(鄭運)[1543~1592]|정혁
재질 화강암
크기 168㎝[높이]|67㎝[너비]|21.5㎝[두께]
소유자 부산광역시
관리자 부산광역시 사하구
문화재 지정번호 부산광역시 기념물

[정의]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몰운대 내에 있는 임진왜란 때 순절한 녹도 만호 정운(鄭運)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건립 경위]

정운공순의비(鄭運公殉義碑)는 1798년(정조 22) 정운[1543~1592]의 공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그의 8세손인 다대포 첨사 정혁이 세웠다. 이조 판서 민종현(閔鍾顯)이 비문을 짓고, 훈련대장 서유대(徐有大)가 썼다.

[위치]

정운공순의비는 다대포 몰운대 서남쪽 정상인 군사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소재지 주소는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산145번지이다.

[형태]

비석의 재질은 화강암이며 크기는 높이 168㎝, 너비 67㎝, 두께 21.5㎝이다.

[금석문]

비의 앞면에는 ‘충신 정공운 순의비(忠臣鄭公運殉義碑)’라는 비제(碑題)가 적혀 있고,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새겼다. “동래 몰운대는 옛날 녹도 만호(鹿島萬戶) 증병조판서(贈兵曹判書) 정운 공이 순절한 곳이다. 공이 처음 녹도에 부임하였을 때 왜적이 나라의 병사를 모두 모아 침략해 와서 먼저 영남 지방을 함락시키니 임금께서 급보를 듣고 놀라시고 서쪽 의주로 피해 가셨다.

그때 충무공 이순신이 호남 좌도 수사로 있었는데, 소속 진영의 장수와 보좌관들을 모아 일을 의논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각기 의견이 다르자, 공이 혼자 분연히 일어나 이공에게 청하기를 ‘지금 적들이 영남을 함락하였는데 앉아서 보기만 하고 구하지 않으면 이는 적의 행군을 스스로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적이 아직 우리 지경에 이르지 않았으니 급히 병사를 끌고 가서 공격하면 우리 군사의 사기도 등등해질 것이요, 또한 우리 수비를 견고하게 하는 일도 될 것입니다. 하물며 지금 임금께서 피난 가 계시니, 이는 분명 군주가 욕될 적에 신하가 목숨을 바치는 때입니다. 제 한 몸 죽음으로 여러 장수들의 선봉이 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공이 그 말을 장하게 여기고 그의 계책을 따라 그날로 모든 부대에 명령을 내려 배를 타고 영남으로 향하였다. 왜선을 옥포에서 만났는데 우리 군사들이 적을 처음 보는지라 감히 누구도 나서서 그 예봉을 시험해 보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공이 노를 재촉하며 북을 울리게 하고, 여러 장수들의 앞에 나가 칼을 치며 사기를 돋우니 군사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다. 그리하여 50여 척을 깨뜨려 불사르고 다시 사천으로 진격하여 적선을 격파하니 모두 합쳐 100여 척에 가까웠다. 싸울 때는 공이 반드시 먼저 올라 선창이 되었다.

또 고성과 거제 사이에서 적을 만났는데, 적의 사기가 매우 높았다. 공은 이공에게 청하여 적을 한산도 큰 바다로 유인한 다음 깃발을 휘둘러 노를 돌린 뒤 적에게 육박해 가니, 대포와 북소리가 바다를 들끓게 하고 화살과 돌이 공중에 가득 차 적들은 사기가 꺾여 감히 싸우지를 못하였다. 그러자 모두 일어나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그 배를 모조리 불살랐다. 대개 전쟁이 시작된 이래로 이렇게 크게 이긴 적이 없었다. 첩보가 행재소(行在所)에 알려지자 임금께서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올려 임명하고 장차 크게 쓰려고 하였으나, 공은 그 공로를 차지하지 않고 더욱 뜻을 가다듬어 적을 섬멸하였다.

다시 부산으로 진격하였는데, 채 도달하기도 전에 몰운대 아래에서 적을 만났다. 공의 마음이 갑자기 흔들려서 알아보니 몰운대의 ‘운(雲)’ 자 발음이 공의 이름과 같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여기서 반드시 죽을 것을 각오하고, 군사 일을 부탁하며, ‘내가 죽더라도 적들이 그 사실을 알아 사기가 나지 않도록 하라’고 당부하였다. 마침 해가 지고 바람이 급해지자 장수들이 퇴각하려고 하였으나, 공은 ‘내 이미 적과 함께 같이 죽기로 맹세하였다’고 하며 따르지 않았다. 결국 나가서 힘써 싸우다가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것이 공이 공훈을 세우고 순절한 사실의 대략이다.

그렇다! 공은 평소에도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아 벼슬이 가장 낮았으나, 난리를 당해서는 분발하여 말은 장렬하고 의리는 엄정하였으며, 계책을 결정하고 용맹을 선창하여 죽어도 후회하지 않았으니, 적의 예봉을 꺾어 국난을 막아 냄으로써 중흥의 기틀을 마련한 위대한 공적은 비록 그 몸은 먼저 운명하였다 할지라도 그 공로는 짝할 바 없다고 하겠다. 옛날 당나라의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이 수양(睢陽) 땅 하나를 지킴으로써 강회(江淮) 지방을 보호하고 마침내 죽었는데, 사람들은 천하가 망하지 않은 것은 두 사람의 힘이라고 평가하였다. 뒷날 이공과 공에 대한 평가도 분명 장순과 허원보다 낮지 않을 것이다. 또한 공과 같이 낮은 관직의 사람으로서 일에 앞장설 수 있었으니, 공은 더욱더 위대하고 빼어나며 비상한 사람이었다고 할 것이다.

지금 임금께서 재위 20년에 교지를 내려 공의 충성과 용맹을 포상하신 것이 수백 마디이니, 이제 해와 별처럼 밝게 드러났다. 아울러 공의 8대손 혁(爀)을 찾아 다대진 첨사로 임명하였다. 다대진은 동래부에 속한 땅이요, 몰운대는 그곳 관할이다. 그가 부임하자 옛 사적을 발굴하여 충신을 현양하는 조정의 특별한 은전을 드러내지 못할까 걱정하였다. 이에 몰운대 위에 비석을 세우고 당시의 사실을 특서(特書)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우러러보며 공경토록 하려고 하여 서울로 편지를 보내어 나에게 비문을 요청하였다.

아! 공은 장렬한 사람이다. 그 영걸 찬 혼령과 굳센 혼백이 죽음을 따라 사라지지 않고 바다와 산 사이에 서려 바람과 천둥을 몰아 못된 고래를 베어 버리고 항상 대마도를 걷어차고 강호(江戶)를 짓부수는 기상이 있는 듯이 여겨진다. 몰운대는 바다 위의 자그만 언덕일 뿐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200년 뒤에 이곳을 지나며 그 사람의 위대한 의열을 생각하면, 오직 이 한 조각 비석이 남쪽 끝의 구리 기둥이 되어 오랑캐로 하여금 스스로 두려워하여 바닷가를 길이 굳건하게 할 것이니, 어찌 이곳이 다만 의열로 순절한 땅에 그치고 말겠는가! 이 일들을 써서 기록하노라.

숭정 기원 후 세 번째 무오년[1798] 3월 8일. 숭정대부 행이조 판서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춘추관사 홍문관 제학 오위도총부 도총관 민종현 지음. 훈련대장 가의대부 병조 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훈련원 도정 서유대 씀[東萊之沒雲臺者 故鹿島萬戶贈兵曺判書鄭公運殉義之地也 公始任鹿島 倭賊傾國來寇 先陷嶺南路 上聞警急 西幸龍灣以避之 時李忠武公舜臣 爲湖南左道水使 會屬鎭及將佐 與計事 衆各異見 公獨奮然請于李公曰 今賊陷嶺南 而坐視不救 是行自及也 賊未至吾境 而急引兵擊之 士氣可壯 亦所以固吾守也 況今君父蒙塵 此正主辱臣死之秋 我當以一死爲諸將先 李公壯其言而從其策 卽日下令諸軍 乘船向嶺南 遇倭船於玉浦 我師初見賊 莫敢先試 其鋒 公促櫓鳴鼓 出諸將前 擊劍勵士 士無不殊死戰 遂破其五十餘艘而焚之 進至泗川 破賊船 前後近百艘 戰必先登爲之倡 又出遇賊於固城巨濟之間 氛甚盛 公請於李公 誘賊至閑山大洋 麾旗回櫓 以與賊薄 枹鼓盪海 矢石彌空 賊氣奪 不敢戰 遂奮擊大破之 盡燒其船 蓋自寇亂以後 剋捷之盛 未之有也 報聞行朝 上超授折衝將軍 將大用之 公則不有其功 益勵志滅賊 進趍釜山 未至 遇賊于沒雲臺下 公忽心動 覺沒雲之雲 方音與公名相似 因自畫必死 處置軍事曰 我死 勿令賊知而生氣 會日暮風急 將領欲退 公不肯曰 吾已與賊誓不俱生矣 遂進力戰 中流丸以歿 此爲公立功殉身之大略也 嗚呼 公之在平時 不自表見 官最卑 及其臨亂奮發 辭壯而烈 義嚴而正 決計倡勇 至死不悔 用能摧賊鋒而捍國難 以基中興之偉績 雖其身先殞 而功莫與爲倫 昔唐之張巡許遠 以一睢陽而藩蔽江淮 卒以身死之 議者 以天下之不亡 爲二人之力 後之視李公及公者 必不在張與許之下 若公之微而能首事 尤可謂奇偉特絶非常之士矣 今上二十年 下敎褒公忠勇凡數百言 昭揭若日星 仍訪公之八世孫爀 超授多大鎭僉使 鎭在萊府地 臺爲其所管 旣至 懼無以發揮舊蹟以揚朝家顯忠之殊典 於是 將豎碑臺上 特書當時事 俾觀瞻咸聳 馳書至京師 徵余爲文 噫 公烈丈夫也 意其英靈毅魄 不隨死以亡 蟠結於海山之間 驅駕風霆 斬截鯨鯢 常若有蹴馬島搗江戶之氣 臺卽海上之一小阜爾 然於息兵二百年之後 過是地而想其人之偉烈 則惟此一片石 爲南極之銅柱 使蠻夷自讋 海陲永鞏 豈但爲殉義之地而已哉 遂書以記之 峕 崇禎紀元後三戊午三月八日也 崇政大夫行吏曹判書兼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事 弘文館提學五衛都摠府都摠管 閔鍾顯 撰 訓練大將嘉義大夫兵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訓練院都正 徐有大 書].”

[현황]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20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부산광역시에서는 1974년부터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정운공순의비를 통해 1592년(선조 25) 9월 1일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부산포 해전에서 일본 군함 500여 척과 싸워 100여 척을 격파할 때 녹도 만호 정운이순신 장군의 우부장(右部將)으로 참전하여 용감하게 싸우다가 순절하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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