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2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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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裵信己妻貞夫人昌寧成氏旌閭碑 |
영어의미역 | Stone Monument for Honoring the Virtue of Lady Seong |
이칭/별칭 | 증자헌대부 배신기 처 열부 정부인 성씨 정려각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상기 |
[정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범방동에 있는 조선 후기 배신기 처 정부인 창녕 성씨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
[건립 경위]
1670년(현종 11) 배신기 처 창녕 성씨(昌寧成氏)[?~1698]는 남편이 학질을 앓자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먹여 10년이나 더 살게 하였고,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삼년상을 치른 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열부이다. 정부인 성씨 정려비(貞夫人成氏旌閭碑)는 1698년(숙종 24)에 정부인 성씨의 정려를 알리기 위하여 세웠다. 비는 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에 부산광역시 강서구 범방동 1127번지 탑동 마을로 옮겨서 1904년(고종 41) 기와를 다시 덮었으나, 또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지자 1942년 12월 후손들이 나무를 돌로 바꾸고 비석과 석각을 세워 정비하였다.
[형태]
비의 재질은 화강암이며, 수직형 비석이다. 팔작지붕의 정려각에 모셔져 있다.
[금석문]
비석에는 ‘증 자헌대부 배신기 처 열부 정부인 성씨 정려각(贈資憲大夫裵信己妻烈婦貞夫人成氏旌閭閣)’이라는 비제(碑題)가 적혀 있고, 다음과 같은 내용을 새겼다. “천지의 도는 정성일 뿐이니, 사람이 능히 자기 몸을 반성하여 그 정성을 다하면, 귀신과 천지를 감동시킬 수 있다. 옛 열부 성씨 같은 이를 그렇다고 말할 만하다.
옛날 조선 숙종 무인년(戊寅年)[1698]에 정려를 명령하여 정려각이 김해군 와룡리에 있었는데, 뒤에 탑동으로 옮겼고, 고종 갑진년(甲辰年)[1904]에 기와를 다시 덮었으나, 이제 또 해가 오래되어 무너지니 후손 누가 튼튼하게 하여 썩지 않게 하려고 나무를 돌로 바꾸어 비석과 석각을 세우려고, 나를 불러 기문을 청하니, 내가 그 판면(板面)의 옛날에 쓴 것을 살펴보니, 성씨는 본관이 창녕이요, 참의(參議) 윤(胤)의 딸이요, 증자헌대부 배공 신기의 아내이었다.
타고난 자질이 정숙하고 친정에 있을 때 효도와 순종으로 소문났으며, 시집에서 시부모를 잘 섬기고 남편을 거스르지 않아, 이웃과 마을이 모두 칭찬하였다. 불행히 남편이 학질에 걸리자 온갖 약이 효력이 없었는데, 어떤 이가 사람의 살을 먹이면 나을 수 있다 하여, 드디어 허벅지 살을 잘라 먹였더니 과연 그 효험을 얻었다. 이렇게 한 것이 두 번이나 되었다. 남편이 풍진[배꼽이 탄탄하여 누르면 아픈 병]에 걸려 여러 해 자리에 누워 의원이 치료할 수 없게 되니, 드디어 미음산(美音山) 바위굴 아래에 올라가 호랑이 표범의 소리도 두려워하지 않고, 안개와 비가 옷을 적시는 것도 꺼리지 않고, 목욕재계하여 백일 동안 제(祭)를 올리니 곧 나았다.
또 몇 년간 이질을 앓아 병이 다급해지자, 집 가까운 깨끗한 곳에 단을 쌓고 밤마다 별에 빌며 자기가 대신하기를 빌었더니, 10년의 목숨을 연장하였고, 남편의 죽음에 기절하였다가 깨어나 몸소 수의(壽衣)와 염 이불을 마름하여 죽은 이 보냄에 유감이 없게 하였다.
삼년상이 끝나자 곧 조용히 자결하니, 아아 예로부터 부인의 정열이 어찌 한정이 있으랴마는 성씨처럼 그 정성을 다한 이도 드물 것이다. 남편의 병에 다리 살 자르기, 산제 지내기, 별에 빌기 등으로 여러 번 소생시키고, 남편이 죽어 애통을 참고 예를 다하고 곧 목숨을 거두었다. 조정에 아뢰어 왕이 정려를 표하여 지금까지 이르렀는데, 후손의 정성이 지극하여 하늘과 신을 감동시키지 않을 수 없다. 아아, 위대하도다! 돌아보아 생각건대, 세상이 무너지고 윤리가 없어지니, 이 정려각을 다시 세우는 것도 역시 풍기를 진작하여 세상에 남의 아내 된 사람으로 하여금 남편에게 정성을 다하게 하려 함이다. 내가 듣고 장하게 여겨 드디어 붓을 떨쳐 이 글을 쓰는 것이다.
임오[1942] [12월] 생백 남평 문봉호 짓고, 함안 조정규 쓰다[天地之道 誠而己 人能反身而極其誠 則可以感鬼神 可以動天地也 若故烈婦成氏 亦可謂云爾己矣 昔我肅廟戊寅 銘旌其閭 在金海郡臥龍里 後移建于塔洞 高宗甲辰 重葺之今于 歲久傾圯 傍系孫某某 謀欲堅固不巧 將以石代木 而碑之閣之 徵記於不忘 不忘按其板面舊題 成氏 籍昌寧 參議胤女 贈資憲大夫裵公信己之妻也 天資貞淑 在家以孝順聞 及歸 善事姑嫜 無違夫子隣里皆稱之 不幸夫遘疾疾 百藥無功 或云用人肉 可愈 遂割股而進 果得其效 如是者 至再 夫又患風痹 累歲沈綿 至不可醫 遂上美音山窟巖下 不畏虎豹之嘷 不憚霧雨之濕 齊沐虔祭 至百日乃瘉于 幾年 有痢疾 疾革 遂築壇于家傍淨地 夜夜禱辰請代以延十年之命 及其盡哭 旣絶而甦 親裁衣衾 送終無憾 三喪畢 乃從容就義 鳴乎 自古夫人之烈何限 而鮮有如成氏之致極其誠也 夫病而剖股焉 祭山焉 禱辰焉 累得其蘇 夫歿而忍痛焉 盡禮焉 乃隕厥命 聞于朝而王用表宅 迄于今 而傍裔盡力者 莫非至誠之動于天而感神人也 何其偉哉 顧念世壞綱淪 此閭之重建 亦足以風勵 夫世之爲人婦者 使之致誠於所天也 余聞 而壯之 遂奮畢以書 壬午[1942]蜡月[12월] 哉生魄 南平文鳳鎬 記 咸安 趙定奎 書].”
[현황]
배신기 처 정부인 창녕 성씨 정려비가 있던 곳은 2008년부터 2011년에 걸쳐 미음산업단지를 조성하면서 수용되었고, 비석은 부산박물관으로 이전되어 야외 전시 중이다.
[의의와 평가]
열부 창녕 성씨의 효열 행위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많은 깨우침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