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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2020
한자 柳湜墓碑
영어의미역 Tombstone of Yu Sik
이칭/별칭 증 이조 참판 문화 유공지묘,류식 묘비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부산광역시 강서구 미음동 수정 마을 뒷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박상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비|묘비
양식 갓머리 비석
관련인물 유식(柳湜)
재질 오석(烏石)
크기 비신 115㎝[높이]|54㎝[너비]|24㎝[두께], 갓머리 55㎝[높이]|90㎝[너비]|65㎝[두께]
소유자 문화 유씨 문중
관리자 문화 유씨 문중
건립 시기/일시 1902년연표보기 - 건립
이전 시기/일시 1963년 - 이전
관련인물 생년 시기/일시 1552년연표보기 - 유식 출생
관련인물 몰년 시기/일시 1592년연표보기 - 유식 사망
현 소재지 부산광역시 강서구 미음동 수정 마을 뒷산

[정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미음동에 있는 개항기 임진왜란 때 김해 읍성을 지키다 순절한 유식(柳湜)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건립 경위]

임진왜란 때 김해 읍성을 사수한 유식[1552~1592]의 10세손 유흥철은 유식의 남은 글을 모아 전 의금부 도사 풍산(豊山) 유도헌에게 의뢰하여 비문을 짓고, 광주(光州) 안명언이 글씨를 써서 1902년(고종 39) 4월 묘비를 세웠다.

[위치]

유식 묘비(柳湜墓碑)부산광역시 강서구 미음동 수정 마을 뒷산 부산 과학 산업 단지 입구 신항만 철도 직전의 오른쪽 산 철탑 동쪽 아래에 있다.

[형태]

비의 재질은 오석(烏石)이며, 갓머리 형태이다. 비신은 높이 115㎝, 너비 54㎝, 두께 24㎝이고 갓머리는 높이 55㎝, 너비 90㎝, 두께 65㎝이다.

[금석문]

비의 제목은 ‘증 이조참판 문화 유공지묘(贈吏曹參判文化柳公之墓)’이다. 비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필부로서 몰려드는 적에 항거하고, 한 번 죽어서 임금의 다급한 처지에 보답하며, 반드시 죽기를 맹세하고 성(城)과 함께 죽는 일은 진실로 일찍 생명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기로 결심하였는데, 뜻이 사직(社稷)에 있지 않다면, 그 누가 능히 여기에 참여하리요? 우리 조선, 임진왜란을 차마 어찌 말하겠느냐? 팔도가 어육(魚肉)이 되고, 모든 백성이 전쟁에 휩쓸렸으니, 그 누가 능히 흉봉(匈鋒)[칼로 가슴을 찌름]을 범하여 바로 막을 자가 있겠는가?

하물며 김해 일대는 왜적을 처음 맞이하는 길이라, 짓밟고 짓밟혀 죽음이 더욱 심하였다. 공이 일개 벼슬 없는 선비로 분발하여, 몸은 돌아오지 않고 눈물을 씻으며 대중과 맹세하여 마침내 몸을 죽이니, 그 충성과 용맹은 곧 충무공 이순신, 제봉(霽峯) 고경명과 같은 의리인데, 표창하는 전례(典例)[의전의 본보기]에 차이가 있으니, 지사의 유감이 돌아보아 마땅히 어떻다 하겠느냐?

공의 10세손 흥철씨가 집안에 남아 있는 약간의 글을 나에게 보이며 비문을 청하니 얕은 지식, 유치한 학문에 감당할 일 아니나, 중대한 일에 끝내 사양하지 못하여 삼가 가져온 행장에 따라 아래와 같이 지어 엮는다.

공의 휘는 식(湜), 자는 낙서(樂棲), 문화인이며 좌의정 만수(曼殊)의 6세손, 문성부원군 은(殷)의 5세손, 안양공 수(洙)의 현손(玄孫), 부사 증영의정 백손의 증손, 중종조에 왜적을 정벌한 공신이자 전라 수사 유옹용(柳翁墉)의 손자이며, 아버지의 휘는 서종(緖宗)인데 관직은 현령이며, 명종 임자 정월 15일 공이 태어나서 임진 4월 20일 순국하니, 향년 41세, 묘는 부의 남쪽 남태야면(南台也面)[지금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 수참산(水塹山) 병좌(丙坐)의 언덕에 있으니, 옷과 신발을 장례하였다.

부인은 상주 김씨인데 절행(節行)[예절과 행동]이 정숙하여 변란을 듣고 따라 죽으니, 무덤은 부 동쪽 하동면[지금의 대동면] 산산(蒜山) 정남쪽 언덕에 있다. 아들을 한 명 낳으니 수홍인데, 이가 4남을 낳으니, 장자는 영한이요, 다음은 영호로 무과에 급제하여 만호(萬戶)[정4품 무관직]요, 영락·영문이다. 영한이 두 아들을 낳으니 시춘·시태요, 영호가 다섯 아들을 낳으니 시주·시정·시량·시즙·시단이요, 영략이 두 아들을 낳으니, 시식·시영이요, 영문이 세 아들을 낳으니, 시추·시재·시상이며, 증손 현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아, 공이 정순한 자질과 강개한 뜻으로 나라가 중간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운을 당하여, 처음에 적병이 월당진(月堂津)[지금의 김해시 대동면 월촌리]을 넘으니 공이 길게 탄식하며 말하기를 ‘우리 집은 대대로 국가로부터 은혜를 입었으니, 어찌 앉아서 멸망을 기다리겠느냐?’ 하시며 드디어 형과 가족을 이별하고, 집안의 종을 거느리고 부성(府城)에 들어가니, 부사 서예원이 이미 진양군으로 달아났다.

드디어 송빈, 이대형, 김득기 공과 더불어 군사들을 위무하여 가로되 ‘부사가 비록 떠났으나, 우리 네 명이 여기 있으니, 원컨대 일심보국(一心報國)하여 혹시라도 마음을 흔들리지 말라’ 하니 모두가 ‘옳소!’ 하였다. 얼마 후에 적이 상류에 물을 막아 성안이 병들고 목마르니, 물을 마실 수 없었다. 말을 내어 항복하자는 사람이 있어, 공이 즉시 항복하자고 말한 사람을 목 베니, 부대가 숙연하였다. 공이 객사 뜰 앞에 땅을 파서 샘물을 얻어 물을 들어 적에게 보이니, 적이 신이라고 여겼다.

무릇 7주야를 부지런히 지키니, 군중의 마음이 공을 믿었다. 적이 서로 이르기를 ‘이 성안에는 반드시 능력 있는 자가 있다’ 하며, 이날 적이 보리를 베어 성과 나란히 하여 드디어 몰려 들어오니, 공이 칼을 뽑아 앞에 서서 수백 명을 죽였으나, 일이 어쩔 수 없음을 알고, 곧 송·이·김 세 공과 전패(殿牌) 아래에 나아가 하늘을 향해 통곡하며 북향하여 왕에게 절하고, 적을 꾸짖은 뒤 굴복하지 않고 죽으니 곧 4월 20일이었다.

객사 뜰아래 우물을 지금도 ‘유공정(柳公井)’이라 하며, 난이 끝난 뒤 일이 나라에 알려져 병조 참의를 추증 받았다. 부사 정현석이 주지(州誌)를 열람하다가 유공이 충렬사에 빠졌음을 보고, 깊이 슬프고 아까운 마음을 일으켜, 진주 충렬단, 동래 송공단의 예에 따라 관찰사를 통해 임금에게 알려 청하였더니, 곧 사충단(四忠壇)을 설치하여 송·이·김 세 공과 함께 매년 순절한 날, 사림이 제사 지내는데, 그 후 갑신에 이조 참판으로 가증(加增)[더 보탬]하니, 역시 역수(曆數)가 달라서다.

그 비명에 말하기를, ‘국세가 중간에 막지 못해 섬 오랑캐가 안으로 소란하니, 형세는 풍우와 같아 누가 그 예봉을 당하랴! 공이 당시 소매를 떨치고 칼을 잡았으니, 이는 죽음과 다르지 않으니, 성과 더불어 순국함이다. 열렬한 빛이 우주에 빠져, 이제 돌을 다듬어 위대한 충렬을 표시한다. 내 비를 새겨 후손에게 보이니, 천억 년 토록 전하게 하노라.’

고종 39년[임인, 1902] 4월 일에 전 의금부 도사 풍산 류도헌 삼가 짓고 대한민국 52년 경술 4월 일 광주 후인 안명언 삼가 씀[匹夫而抗豕突之賊 一苑而報君父之急 誓以必死 與城俱亡 苟非早辨熊魚志存社稷 則其執能與於此哉 我東龍蛇之厄 尙忍言哉 八路魚肉群生派蕩 其有能犯凶鋒直向以禦者耶 矧又金官一路當賊鋒初犯之路 蹂躙充斥 尤有甚焉 公以一布衣 奮之顧身 雪涕誓衆 竟以身殉之 其精忠偉烈 直與忠武李公 霽峯高公 同一義理 而表章之典 有所差殊焉 則志士之憾 願當何如哉 公之十世孫興轍氏 携家臧短幅 示不妄而乞銘焉 則有非淺識夢學所可承當顧事契之重 不可以終辭 謹依來狀 撰次如左 公諱湜 字樂棲 文化人左議政曼殊六代孫 文城府院君殷之五代孫 安襄公洙玄孫 府使 贈領議政伯孫曾孫 中廟朝征倭功臣 全羅水使號愼翁墉孫 考諱緖宗 官縣令以 明廟 壬子正月十五日生 公壬辰四月二十一殉國 享年四十一 墓在府南台也面水塹山丙向原 衣慺葬也 配尙州金氏節行莊 一開變而苑從 墓在府東下東面蒜山子坐之阡 生一子 秀弘 是生四男 長英漢 次英湖 武萬戶 英洛 英汶 英漢生二男 是奉 是泰 英湖 生五男 是柱 是楨 是樑 是楫 是橿 英洛 生二男 是拭 是楹 英汶 生三男 時樞 時梓 時相 曾玄以下不錄 鳴乎 公以貞純之姿 慷慨之志 當國家中否之運 始賊兵之渡月堂津也 公慨然長歎 曰吾家世守國恩 豈可坐而待亡 遂與伯兄訣 率家僮入府則 府使徐禮元 已赴晋陽軍矣 遂與宋公賓 李公大亨 金公得器 撫慰士卒 曰主倅雖去 吾四人在 願一心報國 無或撓心 衆咸曰諾已而 賊壅水上流 城中病渴 不得飮 皆言出降 公立斬言降者 一隊軍肅然 公於客舍階前 堀地得井 揚水示賊 賊以爲神 凡七晝夜 勤守 衆情 恃而爲賴 賊相謂 曰此城中 必有能者 是日 賊刈麥 與城齋 遂攔入 公拔劒在剪 手殺數百級 而賊勢漸熾 知事不濟 乃與宋李金三公 就殿牌下 號天痛哭 北向拜闕 罵賊不屈而死之 則四月二十日也 客館階下井 至今名爲柳公井 亂靖後 事聞于朝 贈兵議 今上辛未 府使鄭公顯奭 閱府誌 以柳公之見漏於忠祠 深致慨惜之意 請依晋州忠烈壇 東萊宋公壇之例 請于方伯 啓聞于 朝乃設四忠壇 與宋李金三公每年殉節之日 士林俎豆之 其後甲申加 贈亞銓 亦異數也 系以銘曰 國勢中否 島夷內訌, 勢若風雨 孰抗其鋒, 公時舊衤夬 雪涕杖刃, 之死靡他 與城以殉, 烈烈之光 彌亘窮宙, 築壇以享 塹山之右, 一片麗牲 尙闕顯刻, 今謀伐石 以表偉烈, 我銘示後 俾垂千億 上之三十九年 壬寅四月 日 前行義禁府都事 豊山 柳道獻 謹撰 大韓民國 五十二年 庚戌 四月 日 廣州後人 安明彦 謹書].”

[현황]

유식 묘비부산광역시 강서구 지사동 부산 과학 산업 단지로 들어가는 입구 오른쪽 산중턱에 있다. 본래 위치는 부산광역시 강서구 미음동 수정 마을 뒤에 있었으나, 미음 산업 단지가 조성되면서 마을이 없어져 1963년 풍상산 중턱 유식의 묘 옆에 세웠다.

[의의와 평가]

유식 묘비는 임진왜란 때 지역을 지키고자 하였던 순절인의 모습과 정신을 널리 알리는 데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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