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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수 효사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940
한자 金洪秀孝思碑
영어의미역 Stone Monument for Honoring Filial Piety of Gim Hongsu
이칭/별칭 참봉 김해 김홍수 효사비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 225-1 진목 마을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박상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비|효사비
양식 화강석으로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만들어 덮어 놓음
관련인물 김홍수(金洪秀)|문선희(文善禧)|이민희(李民熙)
재질 화강암
크기 비신 120㎝[높이]|46㎝[너비]|15㎝[옆 너비]
소유자 김해 김씨
관리자 김해 김씨
건립시기/일시 1884년 3월연표보기 - 건립
관련인물 생년시기/일시 1843년연표보기 - 김홍수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903년 4월 15일연표보기 - 김홍수 사망
현 소재지 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 225-1(진목 마을)
원소재지 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 225-1(진목 마을)

[정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에 있는 개항기 효자 김홍수(金洪秀)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

[건립 경위]

명지의 효자 김홍수[1843~1903]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사위 문선희(文善禧)가 1884년(고종 21) 3월 세웠다. 비문은 소성(邵城) 이민희(李民熙)가 지었다.

[위치]

김홍수 효사비(金洪秀孝思碑)는 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 225-1번지 진목 마을에 있다.

[형태]

비의 재질은 화강암이며, 비신(碑身)의 높이보다 약간 큰 두 개의 돌기둥 안에 비석이 세워져 있고, 그 위에 가첨석(加檐石) 모양의 돌을 얹어 비각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비석과 돌기둥 사이의 간격이 매우 좁다. 비신의 크기는 높이 120㎝, 너비 46㎝, 옆 너비 15㎝이다.

[금석문]

비의 앞면에는 ‘참봉 김해 김공 효사비(參奉金海金公孝思碑)’라는 비제(碑題)가 적혀 있고,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오호라! 이곳 김해부 남쪽 명지도(鳴旨島)진목리(眞木里)는 효자 김공의 집안이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곳이다. 지금 그의 사위 문선희가 비석을 세워 세상에 알리고자 나에게 뒷면에 쓸 기문을 요청하였으니, 대개 지성에 감격할 일이다.

공의 성품은 효성스러워 집안이 가난하였지만 따뜻하거나 시원하며 맛있는 음식이 늘 마련되었으니, 부모의 뜻과 몸을 효성으로 봉양하는 것이 어떻게 고인(古人)을 배워서 그런 것이겠는가? 천성에 따라 저절로 그런 것이리라. 아버지가 오가는 길이 경사져 내려앉아 있으면, 높은 곳은 깎고 낮은 곳은 메웠으며, 산과 강을 건널 곳이면 나무판을 마련하여 다리를 만들었으니, 이 ‘효자로’와 ‘효자교’는 지금도 사람들이 다닌다.

아버지가 병들자 하늘에 기도하고 변을 맛보고 손가락을 잘라 회생시켰다. 마침내 수(壽)를 누리고 돌아가시자, 여막(廬幕)을 지어 시묘(侍墓) 3년을 하였는데, 피눈물이 마르지 않았고, 아침저녁으로 묘를 보살피는데 불빛이 앞을 비추었으니, 이는 신화(神火)가 조응한 것이었다. 참으로 하늘을 감동시킨 효성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감동스런 일이 있겠는가?

신명(神明)께 통한 김공의 효성은 거룩한 조정의 정려 포상을 받는 것이 마땅하여 사림이 천거하고 어사께서도 감영에 보고하여 거듭되는 의논을 거쳤지만, 지금은 인멸되어 일컫는 사람이 없으니 애석하기 그지없다. 장차 인쇄에 부쳐 간행하여 아름다운 이름을 전하고 풍교(風敎)를 세우려는데, 성적 간행소(聖蹟刊行所)의 여러 집사(執事)들도 감탄한 일이다.

오늘날 부모도 버리는 세상을 보면 거의 짐승이나 다름없으니, 어떻게 하면 구원(九原)의 저세상으로부터 김공을 불러일으켜 온 세상의 이목(耳目)을 일깨움으로써 천박해져 가는 오늘날의 풍속을 옳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그러므로 지금 이 일을 추진하는 것은 특별히 공의 효성을 들춤으로써 공의 여러 친족들과 같이 노력하려는 것이다. 오호라! 이 일이 어떻게 단지 한 집안의 귀감일 뿐이겠는가? 대개 세상의 벼슬하는 관리들도 모두 그 도리를 자세히 살펴 그 전철을 따라 밟아야 할 것이다.

공의 휘는 홍수(洪秀)요, 자는 치열(致烈), 세계는 김해(金海)이다. 모암(慕菴) 선생 절효공(節孝公)의 13세손이요, 탁영(濯纓) 선생 문민공(文愍公)의 11세손이며, 휘 복만(福滿)과 휘 유관(宥寬)과 휘 흥식(興植)은 공의 위로 삼대이다. 어머니는 성주 이씨이다.

공은 헌종 계묘년[1843] 생이고, 고종 경자년[1900]에 효릉 참봉(孝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회갑년 4월 15일에 죽었다. 배필은 남원 양씨 익하(益夏)의 따님이다. 아들은 성무(性舞)요, 딸은 남평(南平) 문선희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태원(泰源)과 덕원(德源)이고, 외손자는 용춘(龍春)이며, 증손자는 병은(炳殷)과 복은(福殷)인데, 모두 행실이 있었으나 수를 누리지 못하였다. 공의 효행이 후세대를 비춘 것이 무궁하지만, 다만 정남(正南)과 정일(正一) 두 현손은 아직도 강보에 싸여 있으니, 하늘의 덕성에 대한 보답이 어찌 이리도 인색하신가.

이처럼 덕 있고 선한 사람도 필경 후세에 먼저 알려지지 못하는 것인가? 다행히 현명한 사위의 특별한 정성으로 ……하였으니, 이는 옛날에도 어려운 일이었거늘 하물며 오늘날 무너진 풍속을 가다듬는 데 이 선행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 성대한 일이로다. 『시경(詩經)』 「대아(大雅)」에 ‘백성들이 떳떳한 도리를 잡으니,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도다’라고 하였고, 『순자(荀子)』의 「궤시(佹詩)」에도 ‘제자들아 배우기를 좋아하면 하늘도 잊지 않으시리라’고 하였다. 무릇 모든 군자들은 선행을 하는 데 게으르지 않아야 할 것이다.

계미년 8월 하순 소성 이민희 지음. 갑신년 3월 세움[參奉金公孝思碑 嗚呼 此金海治南鳴旨之眞木里 孝子金公世傳之地也 今其女壻文善禧 竪碑而表世 請余記其陰 蓋以寓至誠之感也 公性孝 家累空 而溫淸甘旨 無不備 至其孝養志體 豈學古人而爲也 自其天性然矣 父往來道路 欹陷則削高補低 跋涉則作板成橋 孝子路·孝子橋 人到于今 及有疾 祝天 嘗矢斷指 回甦 竟以天年終 廬墓三年 血淚不乾 晨夕省掃 有燭前導 此乃神火照應 苟非格天誠孝 安能感動得此 公以通神明之孝 宜其得聖朝之褒旌 而士林薦章 繡題營報 有重難議 今乃湮沒無稱 可勝惜哉 其付鋟登梓 傳芳名樹風敎 聖蹟刊所諸執事之所感歎者也 見今遺親 幾乎皆夷獸 安得起吾公於九原·喚惺一世之耳目·用夏於下喬木之日也哉 故今於是役也 特揭夫公之孝 以與公諸族共勉 嗚呼 是奚但一家之丈尺已哉 凡天下之縉紳章甫 皆宜細繹其道 而循蹈其轍也已矣 公諱洪秀 字致烈 系出金海 慕菴先生節孝公十三世孫 濯纓先生文愍公十一世孫 諱福滿·諱宥寬·諱興植 卽公三世也 妣星州李氏 公以憲宗癸卯生 高宗庚子 除孝陵參奉 不就 甲年四月十五日卒 配南原梁氏益夏女 男性舞 女卽南平文善禧 孫泰源·德源 外孫文龍春 曾孫炳殷·福殷 皆有行而無壽 公之孝之行 可以燾後無窮 而但正男·正一兩玄孫 尙在襁 天之報德 何其嗇也 以若德善 竟不得垂先於後來歟 幸有賢壻之特誠壽□ 此古亦其難矣 而况乎今 而淬礪頹俗 宜乎其慈善之褒彰於世也 嗚呼 盛矣 大雅 曰民之秉彛 好是懿德 荀佹 曰弟子好學 天不忘也 凡百君子 其尙無怠乎爲善也夫 昭陽協洽南呂之下澣邵城 李民熙撰 甲申三月 日 立].”

[현황]

비 주위에는 상록수를 심어 놓았으며, 남편 사후 자결한 개항기의 열부 김윤세(金允世) 처 경주 최씨를 기리는 경주 최씨 정렬각(慶州崔氏貞烈閣)과 나란히 서 있다.

[의의와 평가]

김홍수 효사비경주 최씨 정렬각과 함께 있어 효자와 열부의 상징을 보여 준다.예전에는 이곳에 두 사람의 묘도 있었으나, 1970년대에 경지 정리 사업으로 묘역이 사라지면서 흔적을 알 수 없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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