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9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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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俊玉墓碑 |
영어의미역 | Tombstone of Gim Junok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부산광역시 사상구 모라로192번길 151[모라동 산33]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차철욱 |
[정의]
부산광역시 사상구 모라동에 있는 조선 후기 김준옥(金俊玉)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개설]
김준옥은 1610년(광해군 2) 유도(柳島)[원래 지명은 유두리(柳頭里), 현 부산광역시 사상구 삼락동 일대]에서 태어났다. 자는 명부(明夫)이고, 할아버지는 김영필(金永弼)이다. 천성이 근검하였고, 통정대부에 증직되었다. 비는 김준옥이 제방 축조와 식재를 하여 유도의 물난리를 막은 공을 칭송하는 내용인데, 이 같은 선행은 『양산군지』 산천조에도 기록되어 있다.
[건립 경위]
예전 경상남도 양산군에 속하였던 유도는 강 가운데에 위치하여 섬사람들이 매년 물난리를 당하던 곳이었다. 김준옥이 제방을 쌓고 나무를 심어 홍수 피해를 막게 해 주자, 양산 군수 유인목이 공덕을 찬양하기 위해 묘비를 건립하였다.
[위치]
김준옥 묘비(金俊玉墓碑)는 부산광역시 사상구 모라동 산33번지 모라 주공 아파트 3단지의 남서쪽 산복 도로 뒤 등산로 약 300m 지점에 있다.
[형태]
낮은 기단에 비문과 팔작지붕 이수(螭首)로 이루어져 있다. 비문의 글씨는 해서체이고, 최근에 후손들이 음각된 글씨에 금색 칠을 하였다. 비의 크기는 높이 125㎝, 너비 55.5㎝, 두께 19.5㎝이다.
[금석문]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은 휘 준옥, 자 명부이다. 신라 경순왕 후손으로 고려 때 조상 시흥(時興)이 원의 세력을 토벌한 공으로 금령군에 봉해졌다. 조선 시대 단종 때 조상 문기는 이조 판서, 호는 백촌이었는데 세조 때 단종 복위를 시도하다 화를 당하였다. 사육신의 한 명이었다. 영조 때 복관되고, 정조 때 충목식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김준옥의 할아버지는 휘가 영필인데, 충청북도 영동에서 낙동강 하류 유도로 이사 왔다. 향년 95세. 낙동강 하류에 피해가 많이 나자 나무를 심어 제방을 쌓았다. 읍지에 후인들이 말하길 그 나무를 활인수라 하였다. 1895년 양산 군수가 여기를 방문하였다[通政大夫金寧 金雅溶龜以其糸牒予余于公暇曰吾九代祖通政公墓在東 萊毛羅山巽坐原淑夫人淸道金氏世仁女墓柎雙墳階下糸 葬于公之子若孫曾墓而今將頭刻墓道請敍而銘之余以不 文辭之不得謹按公諱峻玉字明夫糸出新羅宗姓敬順王後 有諱時興麗朝以討叛元勳封金寧君卽金海古號子孫仍爲 貫籍八我 朝世襲贊?爲東方望閥 端廟朝有諱文起吏 曹判書號白村丙子與六臣同禍 英廟辛亥復官 正廟戊 戌 賜謚忠毅寔公六代祖也公之祖諱永弼始自永同移居 于梁之柳島考諱榮福妣密陽朴氏士宗女公生庚戌卒甲申// (좌측)金 享年九十五島在洛江下三二中居民每被懷囊之惠公築堤 種樹爲惠宲跡昭載邑誌後人稱其樹曰活人亭公之子孫今// (뒷면)公諱峻玉墓碣 婦密陽朴氏孫春生曾孫有四長淸發婦晉州姜氏墓皆在公 之墓下同坐向次震聲墓在梁毛羅亥坐次碩浪墓在梁山萬 德伽倻洞子坐次震夏墓在東萊堂里巳坐以下子孫蕃不盡 銘公志行箕文獻可證惟其稱亭活人自有人不忘之惠享年 百歲可見仁必壽之驗古人云無德不壽公仁德之報其在公 之後銘曰 金寧大姓緋玉天顯三文洋洋一島晏毛羅之原有崇四尺 若堂若室禮有昭穆敢毁傷哉視此銘刻 聖上卽昨三十二年乙未五月十六日通訓大夫行梁山郡守// (우측)豊山後學柳寅睦謹識]”
[의의와 평가]
김준옥 묘비는 17세기 낙동강 하류의 생활사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다. 이를 통해 낙동강 범람에 따른 지역민의 대응과 생존 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