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8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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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耕巖私稿 |
영어음역 | Gyeongam Sago |
영어의미역 | Gwak Han-so’s Collection of Poerty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도민재 |
[정의]
1937년에 간행된 부산 동래 출신 유학자 문성준(文聲駿)의 문집.
[저자]
경암(耕巖) 문성준[1858~1930]은 만년에 간재(艮齋) 전우(田愚)[1841~1922]의 문하(門下)에 들어가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하였다. 그 밖의 구체적인 사승 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는 것으로 보아, 간재에게 수학(修學)하기 이전에는 아마도 뚜렷한 스승 없이 자학(自學)으로 학문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1930년 73세를 일기로 삶을 마감했으며, 개항기와 한말에 유학의 정통성을 지키고자 노력했던 인물이다.
[편찬/간행 경위]
『경암 사고(耕巖私稿)』는 1937년 동래인쇄소(東萊印刷所)에서 인쇄·발행되었으며, 1934년에 최원(崔愿)이 쓴 서문(序文)이 있다. 발행자는 김기선(金基善)이며, 인쇄자는 김만도(金晩度)이다. 정확한 편찬 경위는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전우의 문인인 석농(石農) 오진영(吳震泳)이 찬(撰)한 묘갈명(墓碣銘)이 있고, 역시 전우의 문인인 양재일(梁在日)의 발문(跋文)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전우 문하에서 같이 수학하였던 문인들에 의해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형태/서지]
『경암 사고』는 5권 2책으로, 상책(上冊)은 서문과 권1, 2로, 하책(下冊)은 권3~5와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면(面)은 25자 12행으로 된 활자본(活字本)으로, 책 크기는 25.7×18.1㎝이다.
[구성/내용]
상책의 첫머리에는 서문이 있고, 이어서 권1은 「간지(干支)」, 「설후(雪後)」, 「세모자탄(歲暮自歎)」 등 다수의 시(詩)로 구성되어 있고, 권2는 「상간재 선생(上艮齋先生)」, 「여오석농(與吳石農)」, 「답양회원(答梁晦園)」 외 다수의 서(書)로 구성되어 있다.
하책의 권3은 잡저(雜著)와 서(序), 기(記), 발(跋), 논(論), 설(說), 명(銘)으로 구성되어 있다. 잡저는 「답궐리연성공 부문(答闕里衍聖公府文)」, 「저도내각교원문(抵道內各校院文)」, 「김효자 선상문(金孝子善賞文)」, 「예자주해(隷字註解)」의 4편이 있고, 서문은 「수원 김씨 족보서(水原金氏族譜序)」, 「모성계서(慕聖契序)」 등 총 11편이, 기는 「북계정기(北溪亭記)」 등 총 5편, 발문은 「서송처사 유봉 시집후(書宋處士榴峯詩集後)」와 「청한재 안공가장후(聽寒齋安公家狀後)」의 2편이 있다. 논은 「중양론(重陽論)」 1편, 설은 「공부자 화상설(孔夫子畵像說)」, 「이앙설(移秧說)」의 2편, 명은 「좌장명(坐杖銘)」, 「죽장명(竹杖銘)」 등 총 6편이 있다.
권4는 행장(行狀)과 묘갈명(墓碣銘)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행장은 「연은정공 행장(蓮隱鄭公行狀)」, 「처사정공 행장(處士鄭公行狀)」, 「강효자 행장(姜孝子行狀)」의 3편이 있고, 비갈(碑碣)은 「증통정대부 김공 묘갈명(贈通政大夫金公墓碣銘)」, 「숙부인 죽산 박씨 묘갈명(淑夫人竹山朴氏墓碣銘)」 등 총 23편이 실려 있다. 권5에는 「제간재 선생문(祭艮齋先生文)」 등 총 10편의 제문(祭文)이 실려 있고, 부록으로 오진영이 찬한 묘갈명과 양재일의 발문이 있다.
[의의와 평가]
문성준은 한말의 민족적 위기 상황에서, 유학(儒學)[주자학(朱子學)]의 정통성(正統性)을 지키고자 노력하였던 인물이었다. 당시 서구 열강의 침략과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몇몇 학자들은 기존의 유교적 가치 체계로는 급변하는 사회 변동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므로, 유교도 근대 사회에 부합하는 종교로 개혁되어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났다. 진암(眞庵) 이병헌(李炳獻)[1870~1940]이 펼친 공교 운동(孔敎運動)이 대표적인 유교 개혁 운동이다. 문성준은 이병헌의 공교 운동에 대해 비판하고, 이를 성토(聲討)하였는데, 『경암 사고』는 이러한 문성준의 사상을 고찰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