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2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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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聲駿 |
영어음역 | Mun Seogjun |
이칭/별칭 | 정중(正仲),경암(耕巖)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충렬대로 345[안락동 838]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도민재 |
[정의]
근대 부산에서 활동한 동래 출신의 유학자.
[가계]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정중(正仲), 호는 경암(耕巖). 18대조는 고려 말 중국에서 목화씨를 가져온 것으로 알려진 문익점(文益漸)이고, 16대조 이후 대대로 동래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문상로(文相魯)[1835~1864]이고, 어머니는 경주 손씨(慶州孫氏)로, 손영휘(孫永曦)의 딸이다. 자녀는 1남 2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문성준(文聲駿)[1858~1930]은 7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엄격한 훈육으로 학문에 정진하여 일찍 문명(文名)이 알려졌다. 1901년(고종 38) 성균관 박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과 교육에 힘썼다. 순종(純宗)이 남부 지방을 순행하며 안락서원의 충렬사에서 제사를 지낼 때 왕명을 받아 제문을 지어 올리고는 땅바닥에 엎드려 눈물을 흘린 일이 있다.
문성준은 학문을 닦고 수양하는 과정에서 근면이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학문적 완성을 위해 만년에 전라북도 부안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유학자 간재(艮齋) 전우(田愚)[1841~1922]를 찾아가 배움을 구한 데서 문성준의 근면 성실함을 엿볼 수 있다. 함께 공부한 최원(崔愿)도 문성준에 대해 ‘문장은 물론이고 특히 덕행을 철저하게 실천하는 사람’ 이라고 평한 바 있다.
한편 문성준은 유교를 근대 사회에 어울리도록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병헌(李炳獻)과 이승희(李承熙) 등의 공교 운동(孔敎運動)을 비판하고, 유학의 전통을 지키고자 노력하였다. 1930년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만년에 전우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그 전에는 큰 스승 없이 스스로 공부하여 학문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문성준의 저술을 모은 문집 『경암 사고(耕巖私稿)』[동래인쇄소, 1937]가 전한다.
[묘소]
문성준의 묘는 부산광역시 금정구 부곡동에 있다. 석농(石農) 오진영(吳震泳)이 지은 묘갈명에 ‘경상남도 동래군 북면 부곡리’라고 적혀 있는데, 이곳이 현재의 부산광역시 금정구 부곡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