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7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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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劉碩規 |
영어음역 | Yu Seokgyu |
분야 | 종교/불교,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인물/종교인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미숙 |
[정의]
1919년 부산 범어사 3·1 운동에 참여한 승려이자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유석규(劉碩規)의 생몰 연대와 출생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1919년 서울에서 3·1 운동이 벌어졌을 때 부산에서도 범어사의 승려와 학생 등 7명이 참가하였는데, 이들이 돌아와 범어사 명정학교와 범어사 지방학림을 중심으로 범어사 3·1 운동을 계획하였다. 애초 이들은 동래 장날인 3월 18일에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하였다. 그러나 명정학교 학생 오계운이 이러한 사실을 누설하였기 때문에, 3월 18일 새벽 동래구 복천동의 범어사 동래포교당에서 주모자 상당수가 체포되었다.
하지만 검거를 피한 40여 명의 범어사 명정학교와 지방학림 학생은 3월 18일 밤 동래읍 서문 근방에서부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동래 시장을 거쳐 남문까지 시위를 전개하였다. 3월 19일에도 이들은 동래 시장 일대에서 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격문을 뿌리고 만세 시위를 계속하였다. 유석규도 이 시위에 참여하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다행히 체포되지 않아서 옥고를 치르지는 않았다. 이후 유석규는 범어사 불교전문강원 대교과(大敎科)와 서울의 휘문의숙[현 휘문고등학교]에서 수학하였다. 또한 불교 개혁 운동 단체인 조선불교청년회와 그 산하 조직인 조선불교유신회에서 활동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0년 금정중학교 교정에 세운 ‘범어사 3·1 운동 유공비’와 1995년 금정구 구서1동 동래여자고등학교 앞에 세운 ‘범어사 3·1 운동 유공비’에 이름이 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