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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783
한자 暎潭
영어음역 Yeongdam
이칭/별칭 김경주(金敬注),가네야마 게이쥬[金山敬注]
분야 종교/불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나철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승려
성별
대표경력 범어사 주지|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장
출생 시기/일시 1896년연표보기 - 출생
출가|서품 시기/일시 1908년 - 범어사에서 출가
수학 시기/일시 1911년 - 범어사 명정학교 수료
수학 시기/일시 1915년 - 서울 휘문의숙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19년 - 일본 도요대학 철학과 입학
활동 시기/일시 1921년 - 조선불교청년회 도쿄지부의 전국 순회강연단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23년 - 도요대학을 졸업하고 귀국
활동 시기/일시 1923년 - 범어사 명정학교 교장에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26년 - 명정학교의 야회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21년 8월 -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 선고
활동 시기/일시 1931년 4월 - 조선불교청년동맹 중앙 집행 위원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31년 7월 -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우회 총무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34년 - 중앙불교전문학교 학감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37년 이후 - 친일 강연 및 친일 기고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38년 12월 -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장 서리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40년 11월 - 오산불교학교 교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45년 3월 18일 - 범어사 주지 역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1년 - 가네야마 게이쥬로 창씨개명
출생지 부산광역시 동래구
학교|수학지 범어사 명정학교 -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546지도보기
학교|수학지 휘문의숙 - 서울특별시 강남구 대치동
학교|수학지 일본 도요대학 - 일본 도쿄
활동지 범어사 -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청룡동 546]지도보기
활동지 진주제일공립보통학교 - 경상남도 진주시 진주성로 24번길 7
활동지 중앙불교전문학교 -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 3가 26

[정의]

일제 강점기에 부산 범어사 등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전향한 친일 승려.

[활동 사항]

영담(暎潭)[1896~?]은 1896년 부산 동래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경주(金敬注)이고, 법명이 영담이다. 1908년 범어사의 승려 용곡(龍谷)을 은사로 출가하여 사미계를 받고, 오성월(吳性月) 화상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1911년 명정학교를 수료하고, 1915년 서울 휘문의숙[현 휘문고등학교]을 졸업한 뒤, 명정학교의 교원으로 재직하다가, 일본 도쿄의 도요대학[東洋大學] 철학과에 입학하였다. 일본 유학 중인 1921년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조선불교청년회 도쿄지부가 실시한 전국 순회 강연단의 일원으로 부산으로 돌아와 동래·양산·마산·통영·고성·진주 등지에서 강연을 하였다. 이 가운데 6월 30일 진주제일공립보통학교[현 진주초등학교]에서 실시한 강연이 ‘과격 사상’을 선전한다고 하여, 강연단과 더불어 체포되어 8월에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1923년 도요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범어사 명정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1926년 명정학교의 야회장(野會長)을 맡았다. 이때를 즈음하여 영담은 새로운 해석법에 의한 불교 교리를 승려에게 전파하는 데 노력하며 여러 편의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1931년 4월 조선불교청년동맹 중앙 집행 위원을 맡았고, 5월부터 중앙불교전문학교[현 동국대학교] 강사로 채용되어 강의하였다. 7월에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우회 창립총회에서 총무로 선출되었고, 1933년 4월 서무 주임과 학감 사무 취급을 겸임하였으며, 1934년 학감으로 취임하였다. 이 무렵 일제는 식민지 조선의 통치 정책의 하나로 심전 개발 운동(心田開發運動)[신앙심·국가의식·사회공동체 의식의 함양을 의미]을 추진하였고 이는 곧 황민화 정책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때 영담은 심전 개발에 관한 글을 기고하고, 라디오 강연에 출연하는 등의 활동을 벌이면서 일제의 조선 지배에 부응하였다.

일제가 중일 전쟁을 일으킨 1937년을 기점으로 영담은 본격적으로 대일 협력에 나섰다. 8월에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은 황군 무운장군 장병안태 기원제와 시국 인식에 대한 강연회를 개최하였는데, 여기서 영담은 ‘나라를 위하여 몸을 돌보지 않는다[爲國不爲身]’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여기서의 나라는 일본을 지칭하는 것으로 명백한 친일 강연이었다. 1937년 8월 19일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의 주요 임원인 이종욱[31대 본산주지회의 대표, 월정사 주지] 등과 함께 일본 사찰인 박문사(博文寺)에 가서 중일 전쟁 전병사자 위령 대법요와 시국 강연회에 참석하였다. 이후에도 영담은 학감 자리를 유지하기 위하여 가네야마 게이쥬[金山敬注]로 창씨개명하고 친일 활동에 앞장섰다.

1938년 벽두에 「시국 인식과 거국일치의 신념」을 『불교 시보』에 게재하고, 1938년 4월 29일 조선불교중앙교무원에서 ‘동양 평화와 부동의 정신’을 강연하였다. 1938년 12월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장 서리에 취임한 뒤, 1939년 2월 ‘황국 정신 발양에 대하여’, 7월 25일 ‘인생의 진로’란 제목으로 친일 강연을 주도하였다. 1940년 5월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장에서 물러나자, 11월 오산불교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1945년 3월 18일 범어사의 주지로 임명되어 해방 때까지 재임하였다. 8·15 광복 이후 영담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사상과 저술]

저술로는 『인생관』·『석가』·『화엄 철학의 내용』·『조선 문화와 불교』·『심전 개발 강의』·『시국 인식과 거국일치의 신념』 등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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