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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범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721
한자 金鍾範
영어음역 Gim Jongbeoum
이칭/별칭 추산(秋山),김천일(金川一),김천일평(金川一平),김삼민(金三民),박범조(朴凡祚)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귀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민족 운동가
성별
대표경력 부산청년회 총무부 간사
출생 시기/일시 1891년 12월 27일연표보기 - 출생
1919년 - 조선주조주식회사 사장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21년 4월 - 부산예월회 간사에 취임, 조선청년회연합회 제2차 정기 대회에서 의장 중 한 명으로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21년 8월 - 부산주택난구제기성회 실행위원장에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21년 12월 - 교섭실행위원에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22년 1월 5일 - 부산청년회 총무부 간사로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22년 - 대판조선노동동맹회 조직
활동 시기/일시 1923년 1월 - 북성회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23년 8월 - 북성회 순회 강연단 일원으로 귀국
활동 시기/일시 1924년 1월 - 부산노동친목회를 부산노동동맹회로 개칭
활동 시기/일시 1924년 4월 - 조선노농총동맹 창립 대회에서 중앙상무집행위원에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24년 11월 - 북풍회 결성에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25년 6월경 -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다 일본 경찰에 체포
활동 시기/일시 1929년 - 여순형무소에서 출옥
활동 시기/일시 1934년경 - 김삼민이라는 이름으로 신대륙사(新大陸社) 조직
활동 시기/일시 1945년 9월 - 한국민주당 결성에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45년 - 김동운과 함께 『해방전후의 조선진상』 발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4년 4월 4일 - 유치원 보모 호순경과 결혼
거주|이주지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
거주|이주지 서울특별시
거주|이주지 경상남도 진주시
거주|이주지 중국 봉천
학교|수학지 니혼대학 - 일본 도쿄도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계열의 민족 운동가이자 기업인.

[개설]

김종범(金鍾範)은 1910년대 후반 일본에 유학하여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한 우리나라 초기 사회주의자이다. 3·1 운동 직후 부산 지역 기업인으로 활동하며 문화 운동의 청년 선봉장으로 활약하는 한편 사회주의 서클을 이끌었고, 부산노동동맹회를 기반으로 조선노농총동맹 결성을 주도하였다. 사상 단체 북풍회의 맹장으로 활약하다 중국 동북 지방에서 민족 운동에 참여하였다.

[가계]

형은 김종학(金鍾鶴)이고, 동생은 김종한(金鍾漢)이다.

[활동 사항]

김종범은 추산(秋山), 김천일(金川一), 김천일평(金川一平), 김삼민(金三民), 박범조(朴凡祚) 등으로 불렸다. 1910년대 후반 일본 도쿄로 건너가 니혼대학교[日本大學校] 사회과를 다녔다. 이때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하고 선전 활동을 벌였다. 1919년 부산에서 설립한 민족 기업인 조선주조조식회사 사장에 임명되었다. 1921년 4월에는 부산 지역 초기 문화 운동의 구심체인 부산예월회 간사에 취임하여 부산 지역 민족 운동의 청년 지도자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21년 4월 부산의 유지 100여 명이 조선교육개선기성회를 조직하고 서울에서 개최될 임시교육조사위원회에 제출할 진정서를 1천 수백 명의 연서로 작성했는데, 이때 부산예월회 회원과 동래 유지 40여 명이 함께 건의서를 작성하였다. 당시 김종범은 동래의 김병규(金秉圭)와 함께 진정위원으로 선발되어 서울로 올라갔다. 그는 『동아 일보』에 「조선 교육 문제에 관하여 교육조사위원회에 대한 오인의 희망」이란 제목의 글을 연재하였다.

당시 전국적인 교육 개선 청원 운동 단체로 조선교육개선회가 창립되었는데, 그는 여기에도 참여하였다. 1921년 4월에 김종범조선청년회연합회 제2차 정기 대회에서 의장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1921년 7월에는 역시 『동아일보』에 「산업조사위원회에 대한 요망」이라는 글을 연재하여 조선인 본위의 경제 정책을 요구하였다.

민족 자본가들이 선도한 부산 지역 문화 운동은 노동자, 도시 빈민의 삶의 문제로 확대되어 갔는데, 이는 주택 문제 개선 요구 운동과 조선가스전기회사에 대한 항의 운동으로 표출되었으며, 김종범은 이 흐름을 주도하였다. 1921년 8월에 부산주택난구제기성회를 발기하고 주택 문제 해결을 촉구하기 위한 부산 시민대회를 열었는데, 김종범은 실행위원장에 선출되어 ‘주택 문제의 진상’이라는 주제로 연설하였다. 이 대회에서는 차지, 차가인의 동맹 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상설 단체를 조직하기로 결의하였으며, 이는 1922년 3월 28일 부산차가인조합 결성으로 이어졌다. 김종범은 1월 5일 부산청년회 제3회 정기 총회에서 총무부 간사로 선출되었다.

한편, 1921년 9월 부산 부두 노동자 총파업이 벌어지자 김종범은 『동아 일보』 부산지국장으로서 노동자 편에 서서 연일 대대적으로 이 사실을 보도하였다. 당시 부산 지역에는 김종범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사상 서클이 존재하였는데, 이들은 부산 부두 노동자 총파업을 지원하며 이를 목적의식적으로 지도하고자 했다.

한편 김종범은 1921년 12월 부산의 전차, 전등, 가스를 독점 경영하며 횡포를 일삼고 민족 차별을 저지르던 조선가스전기회사에 항의하기 위한 교섭실행위원에 선출되어 활약하였다. 1922년 하반기에는 일본재류조선노동자 상황조사회의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도쿄에서 활동하다 오사카[大阪]에 가서 대판조선노동동맹회라는 조선인 노동자 단체를 조직하였다. 1923년 1월 도쿄에서 사상 단체 북성회 결성에 참여하고, 8월에는 북성회 순회 강연단의 일원으로 귀국하여 서울에서 북성회의 사상 운동에 깊숙이 관여하였다.

1924년 1월에 잠깐 부산으로 돌아온 김종범은 부산 부두 노동자 총파업 투쟁 직후 결성된 부산노동친목회를 부산노동동맹회로 바꾸고, 이를 기반으로 경남노농운동자간친회(慶南勞農運動者懇親會)를 주도하였으며, 나아가 남선노농동맹을 창립하였다. 이러한 활약을 배경으로 그는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 창립 대회에서 중앙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 시기 일본 경찰은 그를 갑종 요시찰인(甲種要視察人) 사회주의자로 지목하여 빈번히 구속하였다.

1924년 11월 북풍회 결성에 참여했던 김종범은 1925년 6월경 코민테른에 화요파 중심의 조선공산당 결성의 부당성을 전달하기 위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하지만 소련 당국으로부터 국외 추방 명령을 받고 중국 동북 지역으로 건너가 항일 무장 투쟁 단체인 정통단(正統團)을 조직하고 단장이 되어 활동하다 일본 경찰에게 검거, 투옥되었다.

1929년 여순형무소에서 출옥한 김종범은 이후 국민부에 참여하여 월간지 『전우(戰友)』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1934년경에는 김삼민이란 이름으로 신대륙사(新大陸社)를 조직하였다.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한국민주당 결성에 참여하여 조직부원이 되었다. 잡지 『국민 시보(國民時報)』를 발행하였다.

[저술 및 작품]

김동운과 함께 『해방 전후의 조선진상』[조선정경연구소, 1945]을 발간하였고, 잡지 『삼천리』에 「극동 문제를 싸고 도는 열국 외상의 수완과 그 인물관」을 발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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