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7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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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蘇山驛 |
영어의미역 | Sosanyeok Traditional Stati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부산광역시 금정구 선두구동 하정 마을 |
시대 | 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한정훈 |
[정의]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 부산광역시 금정구 선두구동에 있던 양산·울산 방면 교통로상의 역참.
[관련 기록]
『고려사(高麗史)』 권82, 병2 참역에 “금주도는 31개소를 관할한다. …… 양주역·황산·원포·위천[양주], 소산[동래], 아등량·기장역[金州道掌三十一 …… 梁州驛·黃山·源浦·渭川(梁州)蘇山(東萊)阿等良·機長驛……]”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권23 동래현 역원에 “소산역(蘇山驛)은 동래현의 북쪽 15리에 있다[蘇山驛 在縣北十五里]”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동래부 읍지(東萊府邑誌)』[1832] 역원에 “소산역은 부의 북쪽 20리에 있으며, 남쪽 휴산역과의 거리는 20리이고, 동쪽 기장 고촌역과의 거리는 20리이며, 북쪽 양산 위천역과의 거리는 40리로 대마 1필, 중마 2필, 복마 7필, 역리 51명, 노비 24구이다[蘇山驛 在府北二十里 南距休山驛二十里 東距機張古村驛二十里 北距梁山渭川驛四十里 大馬一匹 中馬二匹 卜馬七匹 驛吏五十一人 奴二十四口]”라고 기록되어 있다.
[내용]
소산역은 지금의 부산광역시 금정구 선두구동 하정 마을에 있었다. 지금도 이곳 사람들은 소산역이 있었던 하정 마을을 역놈 마을이라 부른다고 한다. 조선 시대 황산도(黃山道)에 속한 소산역은 영남 대로의 종결지인 동래 휴산역과 낙동강 하구의 양산을 잇는 중간 지점에 위치하였다. 임진왜란의 동래성 전투에 관한 기록 중 소산역과 관련된 내용이 있다.
1592년(선조 32) 4월 왜군이 동래성으로 쳐들어왔을 때 경상 좌병사 이각(李珏)이 분투하는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을 두고 “소산역에서 진을 치고 협공하겠다”라는 핑계로 도망친 것으로 전한다. 『동래부 읍지』 역원조에 따르면 “소산역에는 대마 1필, 중마 2필, 복마 7필, 역리 51명, 노비 24구”가 머물던 동래 교통의 요지이었다. 또한 20세기 초에 그린 『부산 고지도(釜山古地圖)』의 제8폭에서 기찰을 지난 지점에서 소산역이 확인되고, 말을 탄 길손과 함께 소산역의 북쪽 멀리에 양산 경계의 사배현(沙背峴)도 확인된다.
[변천]
고려 시대 22역도의 하나인 금주도의 관할 역참 시설로 소산역[동래현 소재]이 확인된다. 고려 때부터 개설된 소산역은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1425]에서도 확인되는데, 조선 시대에는 황산도에 소속되어 존속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1454]에는 성산역(省山驛)으로 기재되었다가, 1462년(세종 8) 8월 이후부터 줄곧 소산역으로 역참 업무를 담당하다가 1895년(고종 32)에 혁파되었다.
[의의와 평가]
소산역은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부산 지역의 교통 네트워크를 확인할 수 있는 역참 시설로, 오늘날 산업화·도시화로 사라져 버린 영남 대로의 복원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