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2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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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州道 |
영어의미역 | Geumjudo Railroa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한정훈 |
[정의]
고려 시대 부산 지역에 설치된 육상 교통망.
[관련 기록]
『고려사(高麗史)』 권82, 병2 참역에 “금주도(金州道)는 31개소를 관할한다. 덕산·성잉·적정·금곡·대역[금주]…… 양주역·황산·원포·위천[양주], 소산[동래], 아등량·기장역, 굴화·간곡[울주], 덕천[언양][金州道掌三十一 德山省仍赤頂金谷大驛(金州) … 梁州驛黃山源浦渭川(梁州)蘇山(東萊)阿等良機長驛屈火肝谷(蔚州)德川(彦陽)]”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내용]
『고려사』에 따르면 전국의 교통망은 22역도(驛道)로 구성되었는데, 그중 하나인 금주도는 중심 역(驛)인 덕산역(德山驛)[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 덕산리]을 필두로 31개 역을 관할하고 있었다. 금주도라는 역의 명칭이 읍명(邑名)과 도(道)를 합친 것인 만큼 금주[김해]를 중심으로 여러 방향의 간선(幹線)이 발달한 형태를 보인다. 즉 덕산역에서 낙동강을 건너 동쪽의 동래현 등으로 뻗은 노선, 성잉역(省仍驛)[금주]에서 서쪽으로 창원을 경유하여 낙동강 변의 군현을 연결하는 노선, 적정역(赤頂驛)[금주]을 거쳐 남쪽의 웅천·진행 지역으로 가는 노선, 삼랑진에서 낙동강을 건너 금곡역(金谷驛)[금주]을 경유해 북쪽 밀양 방면으로 나가는 노선이 그것이다. 현재 김해에서 동서남북으로 통하는 길의 바탕은 이미 고려 시대에 확립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김해에서 낙동강 건너편에 위치한 오늘날의 부산 지역에는 금주도 소속의 소산역(蘇山驛)[동래현]과 아등량역(阿等良驛)·기장역[이상 기장현]이 있었다. 반면 동평현에는 역참 시설이 존재하지 않았다. 동래현의 유일한 역참 시설인 소산역에서 아등량역을 경유하여 양산으로, 그리고 아등량역에서 계속 북상하여 간곡역(肝谷驛)·굴화역(屈火驛)[이상 울주]을 통해 울주로 각각 연결되었다.
동래현을 비롯한 오늘날의 부산 지역에서 금주도의 중심 고을인 금주와의 통행에 이용된 낙동강의 나루 시설은 다음과 같다. 금주도의 역참 분포 현황을 참고하면, 덕산역과 맞은편 낙동강 변의 황산역(黃山驛)[양주]이 있어 황산진(黃山津)을 통해 낙동강을 건너 왕래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통로는 김해~양산간의 최단 코스이다. 이렇게 황산역이 낙동강 건너 김해와 양산을 잇는 나루터로서 중시되었기 때문에 조선 시대 부산 지역을 비롯한 경상남도 동남부 지역을 아우르는 역로망을 황산도(黃山道)라 불렀을 것이다.
양산과 달리 동래현이 금주와 왕래할 때는 황산진이 아니라 금곡동의 동원진(東院津)이나 적정역(赤頂驛)[경상남도 김해시 장유면 관동리]과 연결되는 낙동강의 하구 포구 시설을 이용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의의와 평가]
고려 시대 역도망인 금주도에 관한 연구 성과는 미진한 상태이다. 역·역로망이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제도의 일환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연구 경향은 지방이 아닌 중앙의 관점에서 다루어져 왔다. 이제는 금주도를 비롯한 역·역도를 지역사의 관점에서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동평현에 역참 시설이 없다고 해서 낙동강을 도하(渡河)하는 시설이 없지 않았을 것이고, 그 나루를 통해 낙동강 하류를 건너 김해 지역과 교류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낙동강 양안(兩岸) 지역 간 교역 양상을 살펴본다면 더 많은 지선(支線)으로 구성된 금주도의 실태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