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6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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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萊府重記 |
영어의미역 | Naebu Junggi |
이칭/별칭 | 『내부도 중기』,『동래부 중기』,『각소도 중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동철 |
[정의]
1859년 8월에 동래부 소속 각 기관[기구]의 중기를 모아 엮은 책.
[개설]
중기(重記)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호조에서 주로 전곡(錢穀)을 담당하는 관사(官司)의 출납 회계를 감독할 목적으로 각 관사에게 작성하도록 한 중기이다. 둘째, 각 관청이 소유하고 있거나 특정하게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는 비품 등의 출납 상황을 명확하게 파악할 필요에서 작성된 중기이다. 셋째, 관리가 교체할 때 인수하는 해당 관청의 재산을 파악하기 위하여 해유(解由) 문서와 함께 작성된 중기이다. 『내부 중기(萊府重記)』[상] ‘지통(紙筒)’에 의하면, 1858년(철종 9) 당시 동래부에는 중기 책이 124권 존재하고 있었다.
[저자]
『내부 중기』는 동래부가 편찬한 책이다. 당시 중기를 담당한 향리인 중기색(重記色)은 김문건(金文健), 김필신(金必宸)이다.
[편찬/간행 경위]
동래 부사 정헌교(鄭憲敎)는 『내부 중기』가 편찬된 달인 1859년 8월에 부임하였다. 전임 부사 김석(金鉐)의 『내부 일기(萊府日記)』에는 8월 3일까지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동래 부사의 교체 때에 따라 인수인계를 위해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형태/서지]
『내부 중기』는 필사본으로 상하 2책이며, 책 크기는 55.7×32.5㎝이다. 상권은 118장, 하권은 24장으로 상권과 하권의 분량 차이가 크다. 표지의 좌측에는 ‘내부 중기(萊府重記)’, 그 우측에는 ‘기미팔월일(己未八月日)’이라고 적혀 있다. 1931년 4월 25일 조선총독부 도서관 등록 도장이 찍혀 있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청구 기호 한古朝38-42-1, 38-42-2]. 1면에 16행으로 선을 그어 내용을 작성하였다.
[구성/내용]
본문 시작에 ‘기미팔월일 각소도중기(己未八月日各所都重記)’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이하 동래부 소속 각 기관의 재정 실상이 기록되어 있다. 상권에는 부사(府司)부터 회계색(會計色)까지 25개 기관, 하권에는 서계색, 부창색, 지대색, 일공색의 4개 기관이 기록되어 있다. 기관마다 끝부분에 ‘부사 제이장육행종(府司第二張六行終)’이라 한 것처럼, 중기의 분량을 적어 놓았다. 추가로 작성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그 다음 줄에는 ‘호장 이시윤’이라 한 것처럼, 각 기관의 책임자의 직책과 이름을 적었다.
각 권의 마지막에는 좌수(座首)와 군관의 성(姓)과 수결[사인]이 있고, 그 위에 부사의 수결이 있다. 그리고 중기색 김문건, 김필신의 이름과 수결이 있다. “저희들이 중기를 담당하여 자료들을 세밀하게 살펴서 기록하였습니다. 다음에 혹시 잘못된 일이 있으면 저희들을 처벌하시기 바랍니다.”라는 서약서와 같은 것이 적혀 있고, 각각 24명과 4명의 직책과 이름, 수결이 연명되어 있다. 상권은 25개 기관이지만, 부대동색(釜大同色)과 방역색(防役色)이 겸직이므로, 24명이다.
전체 29개 기관의 중기는 분량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가장 많은 것은 예방색 14장 26행이다. 특히 예방색 중기에는 향교 제기질(祭器秩), 서책질, 사직 제기질, 충렬사 제기질, 서책질, 별사 충렬사 제기제복질, 정첨사 별묘 제기질, 지통고 서책질 등이 기록되어 있다.
호적색에는 동래 지역의 호적 현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호적은 만력(萬曆) 병오[1606]식부터 함풍(咸豊) 무오[1858]식까지 252년간의 것이 모두 남아 있었다. 호적은 3년마다 1번씩 작성되었다. 만력 병오식과 기유[1609]식은 합쳐서 1권이다. 강희(康熙) 임오[1672]식까지는 호적이 1권이다가, 강희 을묘[1675]식부터 2권, 강희 무자[1708]식부터 3권, 옹정(雍正) 을묘[1795]식부터 6권으로 증가하였다. 도광(道光) 을유[1825]식부터는 4권으로 줄었다.
호적 권수의 변동은 인구의 증감, 호구 파악의 방식과 연동되어 있었다. 천계(天啓) 신유[1621]식과 정묘[1627]식 호적은 1859년 당시 멸실(滅失)되었고, 순치(順治) 을유[1645]식은 파손 상태였다. 각 기관별로 물품의 출납 등 변동 상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직전 시기, 추가, 합계, 지출, 현재[유재(遺在)와 실재]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내부 중기』는 유일본으로서, 19세기 후반, 즉 1859년 당시 동래부의 재정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동래부 소속 기관과 담당 색리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 향리 연구에도 도움이 된다. 아울러 공목, 공작미, 일공 등 왜관을 중심으로 한 일본과의 관계 및 동래 향교, 충렬사, 별사, 사직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1859년 8월까지 동래 지역에 조선 시대 호적[구호적]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