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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628
한자 誠信堂
영어의미역 Seongsindang Pavilion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지명/고지명
지역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1동 580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상규 2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훈도 청사
관련문헌 「성신당기(誠信堂記)」|『초량화집(草梁話集)』
제정 시기/일시 1730년연표보기 - 건립
변천 시기/일시 1800년연표보기 - 개축
비정 지역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1동 580

[정의]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1동에 있던 조선 후기의 훈도 청사.

[개설]

1730년(영조 6)에 완성된 성신당(誠信堂)은 그 건물 자체로만 평가해서는 곤란하다. 조선 조정이 1678년(숙종 4)에 옮겨서 설치한 초량 왜관(草梁倭館)에다 18세기에 이르러 교린 외교를 시행하기 위한 각종 시설을 정비하는 한편, 왜관에 체류하는 쓰시마 인들의 약조에 어긋난 행위를 억제하려는 흐름 속에서 판단해야 할 것이다.

[형성 및 변천]

두모포 왜관(豆毛浦倭館) 시기[1607~1678]에 훈도의 청사가 왜관 근처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자세한 사정은 알기 어렵다. 1730년에 완성된 성신당은 동래 부사 이세재(李世載)[재임 기간 1696년 11~1697년 8월]가 초량 왜관 근방의 민가를 빌려서 근무하는 불편을 개선하기 위해 왜관 근방에 있던 초량 촌가를 이주시키고 헐어 버린 다음, 그 자리에 역관들의 청사를 세운 데서 기원한다.

1709년(숙종 35) 권이진(權以鎭)이 동래 부사로 도임한 후의 일이다. 이때 병으로 체직된 역관 홍순명(洪舜明)의 후임자로 내려온 별차 현덕윤(玄德潤)은 왜관을 바로 마주 보는 조선 역관의 청사가 낡아 헐어진 것을 보수할 뜻을 갖고 있었다. 당시 동래 부사 권이진이 같은 뜻을 갖고 있음을 안 현덕윤은 돈 몇 백 관을 출연하여 역사를 완료할 수 있도록 하였다. 현덕윤은 부사의 임기를 마치고 경상 감사로 영전해 가는 권이진에게 훈도·별차의 처소가 비바람을 가릴 수 없고, 조석으로 왜관의 일본인들에게 불성모양(不成模樣)이 보여 국체 손상으로 이어지는 실정을 곡진하게 전달하였다. 이에 새 경상 감사 권이진의 협조로 부산진(釜山鎭)에서 관(關)을 발행하여 절영도(絶影島) 촌의 공급품을 덜어 내어 보리 100곡(斛)이 공사 비용으로 지원되었다.

권이진의 후임 감사인 조영복(趙榮福) 때도 공사비 지원은 비슷한 규모로 시행되었다. 유척기(兪拓基)가 감사로 재임할 때는 공전(公錢)을 빌려 주고 그 이자로 받은 돈으로 지원하기도 하였다. 사역원(司譯院)의 역관들도 비변사(備邊司)에 상언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정승 홍치중(洪致中)의 발의로 영남이 보유한 면포 100단(端)이 공사 비용으로 지원되었다. 박문수(朴文秀)가 관찰사일 때에는 영남의 남은 비용을 덜어서 공적으로 상환하도록 조처가 취해졌다. 현덕윤 이후로는 훈도로 근무한 김시업(金時업), 별차 현상로(玄尙老)·이장(李樟), 그리고 출사 역관 신영래(愼榮來)·황응하(黃應河)가 공사를 감독하였다. 동료 역관 박태신(朴泰信)·한찬흥(韓纘興)·박춘서(朴春瑞)·변기화(卞箕和)·황하성(黃夏成)·정수함(鄭守諴) 등이 도움을 주었다.

현덕윤이 새로 지어진 훈도의 거처로 재차 도임한 때는 1727년(영조 3) 초여름이었다. 이때 담장 공사를 하기 위하여 범어사(梵魚寺)의 승려 의준(義俊)을 비롯한 1,000여 명의 승군이 동원되었다. 현덕윤은 조정에 건의하여 범어사 승군들이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입번하는 역을 면제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 뒤 경상 감사 박문수가, 현덕윤이 개인 비용까지 출연하여 역관들의 근무 청사를 새롭게 단장하여 변방의 체모를 세웠다는 공로로, 현덕윤이 근무 중일 때 부사였던 민응수(閔應洙)와 상의하여 시상을 건의하였다.

1729년(영조 5) 가을 훈도 현덕윤의 임기가 다할 무렵에 부사 이광세(李匡世)가 1년을 더 맡도록 건의하였으며, 100여 관전(貫錢)을 내주어 마치지 못한 곁채 공사를 완료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1730년에 훈도의 청사, 별차의 청사, 나란히 있는 출사 역관의 청사까지 모두 완료되었다. 이후 1800년(정조 24)에 개축하였다. 허름해져서 보수한 건물이 16칸, 새로 지은 건물이 68칸이며, 세 청사 모두 행랑·부엌·마구간·뒷간을 따로 갖추도록 하였고 문창(門窓)·담장이 구비되었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여러 왜관도에 따르면 성신당은 동래부(東萊府)에서 10.8㎞[27리] 떨어져 있었다고 하며, 초량 왜관의 수문(守門)과 설문(設門) 사이에 있었다. 현재 중구 영주1동 봉래초등학교 부근으로 추정된다.

[관련 기록]

「성신당기(誠信堂記)」에 따르면, 훈도의 청사와 별차의 청사, 출사 역관의 청사가 구분되어 서술되어 있지 않고, 상근 역관 훈도·별차의 청사가 중시되어 있으며, 때로는 출사 역관의 청사까지 포함하여 역관들의 청사로 지칭되기도 하였다. 참고로, 쓰시마 번[對馬藩]의 통사 오다 이쿠고로[小田幾五郞]가 남긴 『초량 화집(草梁話集)』에는 훈도·별차의 청사가 하나의 건물로 되어 있으며, 출사 역관의 청사와는 별개의 건물로 묘사되어 있다. 『초량 화집』에 실린 두 건물의 묘사도로 보아서 추가·변형된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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