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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덕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4113
한자 玄德潤
영어음역 Hyeon Deokyun
이칭/별칭 도이(道以),금곡(錦谷)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1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상규 2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역관
성별
본관 천녕(川寧)
대표경력 왜학 역관
출생 시기/일시 1676년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05년 - 증광시에 급제
활동 시기/일시 1711년 - 통신사행의 상통사로 파견
활동 시기/일시 1718년 - 쓰시마로 파견되는 문위역관행(問慰行)[도해역관사, 역관사]의 당하역관으로 다녀옴
몰년 시기/일시 1737년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1734년 - 사역원으로 복귀한 뒤 부산진의 향인들이 송덕비 건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729년 - 동래부 왜학훈도로 근무하며 훈도청 보수
특기 사항 시기/일시 1734년 - 쓰시마 번 송사의 세견미(歲遣米) 100석을 절감하여 정례로 삼음. 그 공로로 종2품으로 승진
활동지 부산진 - 부산광역시 동구
묘소 경상남도 밀양시

[정의]

조선 후기 부산포에서 출발하는 통신사행의 왜학 역관으로 활약하였던 인물.

[가계]

본관은 천녕(川寧). 자는 도이(道以), 호는 금곡(錦谷). 현덕윤의 관향인 천녕 현씨(川寧玄氏)는 역관을 비롯하여 기술관을 다수 배출한 중인 가계의 대명사로 꼽혀 왔다. 참고로 천녕 현씨 가문은 고문서, 묘비 자료, 역대 묘 등이 풍부하게 남아 있어, 중인 가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실제적으로 검토할 수 있을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현덕윤의 고조 할아버지 현수겸(玄壽謙)[1513~1581]은 부사직(副司直)을 지냈고, 죽어서 양주목 별비면[현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에 묻혔다. 현수겸 이후로 양주목 별비면은 천녕 현씨 가의 역대 묘로 자리 잡았다. 현덕윤의 증조 할아버지 대에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 등에 책록되고, 할아버지 대에 이르러 역관 등을 배출하기 시작하였다. 아버지 현한일(玄漢一)은 한학 역관이었고, 현덕윤과 현덕연(玄德淵)[1694~1778] 형제는 왜학 역관으로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는데, 그러한 후광에 힘입어 왜학 전공 역관이 다수 배출되었다. 이 가계의 역관 세전은 갑오경장까지 이어졌고, 일제 강점기 하에서 관직을 지내거나 독립 운동을 한 행적이 나타나며, 현대까지 출세의 흐름은 끊이지 않는다.

[활동 사항]

현덕윤(玄德潤)은 1705년(숙종 31) 증광시에 급제하여 30여 년에 걸쳐 왜학 역관으로 근무하였다. 1711년(숙종 37) 통신사행의 상통사로 파견된 경험이 있고, 1718년(숙종 44) 쓰시마[對馬島]로 파견되는 문위역관행[문위행(問慰行), 도해역관사, 역관사]의 당하 역관으로 다녀왔다. 그는 역관 경력 이외에도 시(詩)에 능했고, 초서와 예서에도 일가견을 보였다.

현덕윤은 1729년(영조 5) 동래부 왜학훈도로 근무하면서 훈도청을 크게 보수하여 국가의 위신을 높였다. 훈도가 근무하는 청사는 설문(設門)을 지나 땔감 창고가 있는 고개를 넘기 전 평평한 곳에 자리하였다. 해변과 인접한 설문에서 산자락으로 능선이 이어졌고, 산꼭대기에서 왜관 방향으로 산줄기가 이어져 있고, 그 밑에 훈도 청사가 있었다.

훈도 청사가 1678년(숙종 4) 초량으로 왜관을 이전한 이후로 제대로 규모를 갖추지 못한 것은 비용 염출의 어려움 때문이었다. 훈도 현덕윤은 여러 해 동안 관비를 절약하고 개인 경비를 지출하여 훈도청을 보수하였다. 중수된 훈도청은 성신당(誠信堂)으로 불렸다. 쓰시마 번[對馬藩]의 노련한 외교가이자 유학자였던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는 조선 표류민 송환선의 서계 개찬(書契改撰) 건을 타결 짓기 위해 바다를 건너와 현덕윤에게 성신당의 기문(記文)을 지어 주었다. 현덕윤아메노모리 호슈는 이미 왜관에서 수차례 대면하였던 사이로, 1711년 통신사행에서 각기 상통사와 쓰시마 번의 안내역으로서 면식을 갖고 있던 터였다.

현덕윤은 1734년(영조 10)에 쓰시마 번[對馬藩] 송사(送使)의 세견미(歲遣米) 100석을 절감하여 이를 정례로 만들었고, 세견미를 줄인 공로로 종2품으로 승진하였다. 그 외 현덕윤은 형제간에 의리가 깊고, 환갑을 넘겼을 때 어머니의 상을 극진히 치르다가 죽었다는 일화도 전한다. 한때 재산을 상당히 모았으나 모두 흩어 버렸고, 형제가 잇달아 죽었는데 저축이 없었다고 한다.

[저술 및 작품]

현덕윤은 시에 능하였다고 전한다. 작품으로 『풍요 속선(風謠續選)』에 7수가 전하고 『이향 견문록(里鄕見聞錄)』에 1수가 전한다. 1711년 통신사행의 상통사로 참가하여 남긴 필적 2점이 일본 시즈오카[靜岡] 세이켄지[淸見寺]에 남아 있다. 현전 여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무계시축(武溪詩軸)를 엮어서 조현명(趙顯命)[1691~1752]에게 발문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묘소]

최근 4~5년 전까지 서울특별시 노원구 화랑로의 태릉을 넘어서서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화접동 샛말에 천녕 현씨 선대 묘 70~80기가 형성되어 있었으나, 택지 조성 사업이 진행되면서 보존되지 못하였다. 현덕윤의 고조 할아버지 현수겸 이하 묘가 군부대와 가까운 음식점 뒤편 배밭에 있었고, 이곳과 약 100m 떨어져서 외가인 온양 방씨(溫陽方氏) 묘를 지난 주택가 밑에 아들인 의관 현태벽(玄泰璧)[1698~1760], 손자 의관 현상호(玄商祜)[1732~1790] 그리고 피장자를 알 수 없는 묘 6~7기가 더 있었다. 남양주시 택지 개발이 이루어질 때 18세기 말엽 경상남도 밀양에 정착한 후손들이 3대 묘를 밀양으로 이장해 갔다.

[상훈과 추모]

현덕윤은 1734년(영조 10) 사역원으로 복귀한 뒤에 부산진의 향인(鄕人)들이 송덕비를 세워 주었다고 한다. 문무관의 송덕비는 흔한 편이었으나 역관의 업적을 기려 송덕비를 건립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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