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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기독청년면려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616
한자 東萊基督靑年勉勵會
영어의미역 Dongrae Young Christian Encouragement Association
분야 종교/기독교,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승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기독교 계열의 청년 단체
설립자 윤병인(尹炳仁)|윤병환(尹炳桓)
설립 시기/일시 1925년 11월 18일연표보기 - 공식 설립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23년 봄 - 실질적인 활동 시작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23년 7월 30일 - 남녀 대토론회 개최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23년 8월 23일 - ‘평등에 대한 일고찰’ 등을 주제로 강연회 개최
최초 설립지 동래교회 -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
현 소재지 동래수안교회 -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지도보기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에 있었던 개신교 단체.

[설립 목적]

동래기독청년면려회는 1920년 6월 13일 동래교회에서 성경 공부 및 토론, 강연 등을 목적으로 설립된 동래기독청년회가 그 출발점이었다. 이후 동래기독청년회는 1923년 봄 임원진의 개편과 함께 개인의 신앙 운동에 머물지 않고 사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동래기독청년면려회로 그 명칭이 변경되었다.

[변천]

동래기독청년면려회의 공식적인 창립일은 1925년 11월 18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창립일 뿐 실질적인 활동은 1923년 봄부터 시작되었음을 각종 문헌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동래기독청년면려회의 전신인 동래기독청년회는 초기 청년 운동 단체의 일반적 성격대로 종교적 성향의 계몽 운동 단체였다. 1920년 7월 3일 동래 수안동예배당에서 동래고등보통학교 교유(敎諭) 법학사(法學士) 곤도 세이이치로[近藤誠一郞]를 초청하여 ‘민족적 관념’이란 주제 하에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또 1921년 4월부터 여자 야학회를 운영하였는데, 예를 들어 4월 27일에는 조선여자교육회 회장 김마리아를 초청하여 동래교회에서 강연회를 주야 2회 개최하였다. 주간에는 김마리아의 ‘현대 조선 청년의 진보’, 밀양의 여성 운동가 고원섭(高遠涉)의 ‘여자의 활동’ 등을 강연하고, 오후에는 김마리아의 ‘가정은 인생의 낙원’과 이자경(李慈卿)의 ‘시대와 우리’, 허정자(許貞子)의 ‘완전한 인격’ 등의 강연이 있었다.

이상과 같이 강연회와 야학 등을 통해 대중의 계몽 운동에 앞장섰던 동래기독청년회는 1923년을 기점으로 약간의 성격 변화를 겪게 된다. 즉, 단순한 개인의 신앙적 구원에 머물지 않고 사회의 제반 문제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는 사회 운동의 성격을 강화하게 된다. 그 결과 1923년 봄부터 동래기독청년회는 ‘동래기독청년면려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이때 개편된 임원진은 1928년 신간회 동래지회에서 활동한 윤병인(尹炳仁), 윤병환(尹炳桓) 등 사회 참여에 관심이 많았던 인물들이 중심을 이루었다.

강연회의 주제 또한 변화하였다. 즉, 종래 동래기독청년회에서 개최하는 강연회의 내용은 주로 개인의 인격 수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면, 동래기독청년면려회는 사회의 평등과 계급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변화는 동래기독청년면려회 주최로 수안동의 동래교회에서 개최된 1923년 7월 30일 남녀 대토론회, 1923년 8월 23일의 강연회 제목에서 알 수 있다. 8월 23일의 강연회 주제는 허영호(許永鎬)의 ‘평등에 대한 일고찰’, 박우윤(朴雨潤)의 ‘경제상으로 본 형사(刑事) 정책’, 김한휴(金漢畦)의 ‘유산 계급의 각성을 촉하여 인류애를 절규’ 등이었다.

동래기독청년면려회의 회장이었던 윤병인은 1925년 11월 동래 지역의 16개 청년 단체들이 모여서 결성한 동래청년연맹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뿐만 아니라 경상남도청년연맹 발기회의 대표로 선출될 정도로 동래 지역 사회 운동에 적극적이었다. 이와 같이 동래기독청년면려회는 윤병인, 윤병환의 사회 활동과 궤적을 함께하면서 1930년대 전반기까지 기독교 계열의 청년 단체로서 사회 운동에 적극 앞장섰다.

[의의와 평가]

동래 지역 최초의 기독교 계열 청년 단체로서 구성원들은 개인의 신앙 운동뿐만 아니라 동래 지역민들의 계몽 운동을 통한 사회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앞장섰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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