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5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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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海文 |
영어음역 | Yi Haemun |
이칭/별칭 | 맹기(孟器)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용범 |
[정의]
조선 후기 다대포 첨사를 지낸 무신.
[가계]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맹기(孟器). 외조카는 영조(英祖)의 열째 딸 화유 옹주(和柔翁主)의 남편 창성위(昌城尉) 황인점(黃仁點)이다.
[활동 사항]
이해문(李海文)[1712~1772]은 1757년(영조 33) 무과 정시(庭試)에 급제하였다. 훈련원 부정으로 임명되었다가 곧 강령 현감(康翎縣監)이 되었다. 훈련도감의 무겸(武兼), 훈련주부(訓練主簿), 비변랑(備邊郞), 중추경력(中樞經歷) 겸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1761년(영조 37) 정평 부사(定平府使)로 나갔다. 1763년(영조 39) 행부호군(行副護軍)이 되고, 그해 11월 조엄(趙曮)을 정사(正使)로 한 조선 통신사행에 정사의 배를 검사하는 명무 군관(名武軍官)으로 동행하여 일본을 방문하였다.
이듬해 5월 부산포로 귀국한 다음 11월에 다대포 첨사가 되었다. 이때 통신사행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 세견선의 출입을 단속하고 밀무역을 철저히 근절하여 그 공로로 중앙 무관직인 오위장으로 영전하였다. 조엄의 평가에 의하면 이해문은 무신이면서도 시를 잘하였다. “장비(張飛)와 같다”는 일본인들의 평가나 “부드러우면서도 내면은 강건하다”고 한 영조(英祖)와 관료들의 평을 통해 이해문의 용모와 심성을 짐작할 수 있다. 지방관으로 나가서는 현지 사정을 잘 파악하여 현명하게 처신하여 양리(良吏)라는 평을 들었고, 임금의 신임을 한몸에 받았다.
[학문과 저술]
다대포 첨사로 있으면서 부산의 명승지들을 둘러보고 그 아름다움을 시로 남기기도 하였다. 그중 운수사(雲水寺)를 노래한 다음과 같은 시 한 편이 전해지고 있다.
사루일상세연허(寺樓一上世緣虛)[절 누각에 오르니 세상사 인연이 공허한데]
황국단풍임소여(黃菊丹楓任所如)[누른 국화와 단풍은 지천으로 피었구나]
승경범어동상후(勝景梵魚東賞後)[동쪽으로 범어사의 아름다운 경치 구경하고]
유광후안북래초(流光候雁北來初)[북쪽에서 오는 기러기의 자취 강물에 어림을 헤아리네]
훤첨고각삼차랑(喧添鼓角三叉浪)[삼차수 물가에 고각 소리 시끄러운데]
나립아손칠점저(羅立兒孫七點岨)[칠점산 봉우리들은 손자 아이들 늘어서 있는 듯하네]
선거백년운수지(仙去百年雲水地)[운수사의 땅에 신선이 떠난 지 오랜데]
야심송뢰주금여(夜深松籟奏琴餘)[깊은 밤 솔바람 속에 거문고 소리만이 남아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