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4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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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達洙 |
영어음역 | Gim Dalsu |
이칭/별칭 | 김달수(金達銖),김달수(金達守)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북구 낙동대로1738번길 10[구포동 263-1]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장선화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김달수(金達洙)[1888~1924]는 1888년 11월 27일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263-1번지에서 태어났다. 한자 이름을 김달수(金達銖)나 김달수(金達守)로도 썼다. 1919년 3·1 운동 당시 구포에서 미곡상을 하였으며 3월 29일의 구포 장터 3·1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구포 장터 3·1 만세 운동은 서울의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3월 중순 경성의학전문학교[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학생 양봉근(楊奉根)이 구포로 와서 서울과 평양의 3·1 운동 소식을 상세하게 전하고 독립 선언서를 전달하면서 계획이 시작되었다. 임봉래(林鳳來)·윤경(尹涇)·유기호 등을 중심으로 거사가 준비되면서 김달수도 구포 지역 청년들과 함께 적극 가담하였다. 여러 차례 협의한 끝에 3월 29일 구포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1919년 3월 29일 구포 장터에서 이들은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를 배포하고 장꾼들과 만세 시위를 하였다. 이때 출동한 일본 경찰이 12명의 주도자를 체포해 가자 김달수와 젊은 청년들은 대오를 정비해 1,200여 명의 시위 군중을 이끌고 구포주재소로 쳐들어갔다. 이들은 구금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구포주재소의 기물을 파괴하는 등 구속자를 구출하는 데 앞장섰다. 이에 일본 군경은 시위대를 해산하려고 무차별적인 발포를 자행하였다. 김달수는 이 과정에서 체포되어,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 받아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28일 석방되었으나 고문과 옥고의 여독으로 약 3년 동안 고생하다가 1924년 12월 3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5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